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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 Aug 09. 2021

나는 여자 육상 선수였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

나는 초등학교 시절  육상부 선수였다.


​내가 어떻게 육상부에  들어가게 된 건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4학년 때부터 여자 육상부를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다. 아마 큰 키에 숏커트를 하고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육상부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나는 매일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운동장을 뛰었다. 친구들이 아직 등교하지 않은 모래 운동장을  러닝화를 신고 매일 꾸준히 달렸다. 아직 해가 뜨지 않는 아침 공기가 참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스트레칭으로 뻣뻣한 몸을 풀 때면 기분이 좋았다.

오버 페이스로 심하게 운동 한 날에는 다음날 종아리 뒷부분 당기면서 근육이 뻐근하게 올라오는데 내가 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표식 같아서 기분 좋았다.


다음날엔 더 열심히 운동해서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재미도 있었다. 남자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기도 하면서 육상 실력도 점점 늘었다. 그만큼 체력도 늘어나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반면, 엄마는 딸이 육상을 하는 것을 영 좋아하지 않으셨다. 평소에도 내 체력이 약한 탓에 종종 코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나무 막대기처럼 삐쩍 마른 체형이었는데 몸도 약한 딸이 웬 육상을 한다고 하니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말린다고 그만 둘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두고 보셨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소심하게 방해하셨다.


예를 들면, 훈련이 있는 아침에 더 자라고 깨워주지 않거나 러닝화가 헤져서 새것으로 교체해야 하는데 한참 뜸을 들이셨다. 물론 얼마 못가 파란색 러닝화를 사주셨지만.


그래서 나는 가끔 아침에 코피가 나는 날에는 엄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피가 묻은 휴지를 쓰레기통 깊이 숨겨 놓았다.


그리고 일명 '빠따'라고 훈련하다 보면 코치한테 맞을 때가 있는데 그것 또한 엄마에겐 비밀이다. 내가 코치에게 맞는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종종 선수들을 엎드려뻗쳐 시키곤 했다. 대나무 걸레로 엉덩이를 한껏 두들겨 맞는 날에는 아픈 고통보다 더 큰 걱정이 엄마가 이 사실을 알까 봐였다. 엉덩이 피멍을 보는 순간 엄마는 당장 그만두라고 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친구들과 약국에서 연고를 사서 학교 운동장 벤치에서 서로 나눠 바르곤 최대한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집으로 조용히 들어가곤 했다.



나는 '달려라 하니' 도 아닌데 코치에게 맞아가면서도 굳이 육상을 계속 했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자발적으로 해왔던 일이 별로 없는데, 살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했던 일 중 하나가 '달리기'였다.


공부는 재미 보단 좋은 대학 가기 위해서 열심히 했고 , 현재 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달리는 것'은 이유 없이 그냥 좋았다.

아무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달리고 연습해서 6학년이 되어서는 학교에서 가장 잘 뛰는 여자 선수가 되었다.


체육 대회가 있는 날 만큼은 그간의 내 기량을 가장 뽐낼 수 있는 시간이었고 계주나 달리기에서는 바통을 들고 가장 마지막에 잡고 뛰는 선수였다. 체육 등급에 '특급'으로 찍히는 도장을 보며 스스로 성취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 육상대회'가 열렸다.

'난 성남시를 대표한 선수야 '라는 마인드로  메달을 따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나는 200m/400m 중거리 선수였는데 그간의 연습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메달권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대회 당일, 갈색 트랙 위에서 가볍게 연습을 하고 본 경기 시간이 다가와서 트랙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연습하던 대로 하면 된다.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 대회다.' 되뇌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총소리를 기다렸다.


​탕!


총성이 울리고 나는 힘껏 달렸다. 너무 흥분될 때는 발이 스프링처럼 튀는 것 같은데 경기마다 꼭 그런 느낌이 든다. 앞뒤 안 가리고 뛰어서 다음날 알 배기기 딱 좋은 오버 페이스를 해야 한다.


50m쯤 코너를 돌고 달린다.

앞 선수들이 보여 따라잡아보려고 애쓴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피니시 라인에 들어섰다.  

숨을 몰아쉬며 전광판을 바라본다.


결과는 4위. 메달권 밖이었다.

'아.. 말도 안돼. 내가 4위라니'​


그동안 대회에서 늘 메달을 따고 순위권에 익숙했던 나는 경기가 끝나고 힘들지 않았는데 아쉬운 마음 때문인지 숨이 더욱 차오르는 것 같았다. 3년 동안 매일 연습해왔는데 이렇게 경기가 끝난 건가 하는 허무함 때문에 쉽게 자리에서 떠나질 못했다.




경기가 끝나고 해 질 무렵, 짐을 챙겨 가려고 하는데 '빠따'로 무섭게 선수들을 후려치던 호랑이 코치 선생님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다 같이 갈 곳이 있다면서 봉고차에 태웠다. 내려보니 언뜻 보면 병원 같기도 한 큰 시설이었다.

코치는 대뜸 유니폼같이 생긴 앞치마를 입으라며 나눠주고 각종 빨래 거리와 청소도구를 손에 쥐여줬다. 쓸고 닦으라고 했다. 이게 또 무슨 일이지 싶었지만 우리는 시키는 대로 코치 말에 따랐다.

그러다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누구지?’ 하고 뒤돌아보니 키가 나만 한 여자아이였다.


조금 달라 보였던 것은 눈의 초점이 나와 맞지 않았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아이였다. 그 아이가 초코파이를 나에게 건넸다. 살짝 당황했지만 파이를 손에 받아 들고선 ‘고맙다’ 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야 이곳이 어딘지 알았다. 이곳은 장애 친구들이 살고 있는 재활원이라는 것을.

여기는 내게 파이를 준 여자 친구처럼 몸이나 마음이 불편한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부모님이 없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어린 내게는 좀 충격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저녁으로 피자를 먹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집착했던 경기 결과의 '승패'는 금세 잊은 듯했다. 분함 대신에 좀 더 다른 것이 다가왔다.


어린 내가 느꼈던 것은 가족, 친구, 친구가 건넨 초코파이, 그 친구의 선한 웃음, 돕고 싶은 마음, 고마운 마음과 같은 것들.


경기에 져서 잔뜩 분한 나를 그 친구들이 되려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으앙, 엄마'


엄마는 어리둥절해하며 경기에서 져서 속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대답하며 말했다.

'엄마, 나 부자 될 거야.

내가 그 친구들 다 구해줄 거야.'​


엄마는 내가 울음이 다 멈추고 나서야 속 사정을 듣고 안심했다고 한다. 어린 내가 보기엔 부모없이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누군가의 도움의 손이 마땅히 닿아야 할 것 같아 보였나보다. 엄마는 어린 나를 꽉 안으며 말했다.


‘그래, 너 꼭 부자 돼서 아픈 친구들 도와주라'고...


엄마는 내가 어른이 된 요즘에도 가끔 그 얘기를 하신다.



도쿄올림픽이 끝났다.

5살 된 아들과 과천 관문 체육공원을 나섰다. 육상 트랙을 보니 어린 시절에 마음껏 뛰던 기억이 생각난다. 아들은 내가 일등을 할거라며 저만큼이나 먼저 뛰어간다. 붉은 트랙을 보니 가슴이 다시 뛰면서 한편 그 친구들과의 기억도 함께 떠오른다.


​​

그래, 이기고 지는 것
경기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지
세상엔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이 더 많지



초등학교 때 내게 이 마음을 심어준 그 곳에 다시 가보려고 한다. 맛있는 음식 가득 들고서 말이다.



© adigold1,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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