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잇독 Aug 28. 2020

무례함을 거부하는 용기는 없다

엉뚱한 화살

사람들은 더 이상 무례함을 참지 않는다.

무례함이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하지만 무례함에 대항하는 용기는 지극히 비겁함으로만 표출된다.

무례를 촉발한 당사자에 대한 분노를 3자에게 돌린다.


직장 상사나 계약상 을의 입장에서 당하는 무례함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하는 척한다. 기꺼이라기보단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감내한다.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당장 내 밥줄이 끊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더럽고 치사해도 참는다"

라는 표현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물론 소신 있게 부당함을 토로하고 퇴사를 하든 적극적인 대항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인내라는 아름다운 덕목을 강제로 욱여넣는다. 그리고 무례한 자들에게 억지로 웃으며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베스트셀러를 집어 든다. 하지만 억눌린 곳은 다른 곳으로 터지기 마련.


본인이 당한 무례함을 억지로 참으며 뜨겁게 달궈진 화딱지는 내가 갑의 행세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만만한 건, 방송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다.

이 영역에서는 내가 광고를 봐주는 갑이기 때문이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더 이상 남을 공격하고 조롱하고 비하하는 개그가 통하지 않는다. 10대 소년들이 거칠게 서로를 대하며 우정을 쌓는 것과 행위가 개그로 여겨지는 때가 분명 있었다. 대략적으로 2010년 이전까지는 그랬다.

승승장구하던 무한도전, 1박 2일. 바보들의 향연을 컨셉으로 인기를 얻고, 버럭 박명수와 독설 김구라가 소위 잘 나가던 시절.


2020년대는 더 이상 방송에서 무례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제 시청자들은 더 이상 예능에서 남을 비하하고 놀리는 장면을 참지 못한다.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일수록 그런 장면이 연출되면 시청자 게시판이 폭주하고 출연자와 제작진이 곤욕을 당한다.

왜 그럴까.

갑자기 한국 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높아졌을까.

갑자기 매너가 좋아졌을까.

우리 사회가 그렇게 '나이스'한가.


여전히 무례함이 판치는 세상에 대한 반작용이다.


지난 3월 지음 <편스토랑>이라는 방송에 출연한 이유리의 독특한 모습에 대한 다른 출연자들의 반응이 논란이 되었다. 나는 44차원 이유리가 보여주는 신선한 모습을 재미있게 보고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유튜브로 그 장면만 다시보기를 하기도 했다. 논란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보통 사람과 다른 특이한 모습에 출연자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이유리를 무시하고 조롱했다는 것에 대한 논란이었다.


<나혼자 산다>도 마찬가지. 출연자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뉘앙스나 표정이 비치기만 해도 다음 주에 고정 출연자들은 사과하기 바쁘다.


이런 현상은 출연자들의 몸 사림으로 나타나고 예능은 다큐가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는 않는다. 남을 헐뜯고 공격하는 개그와 재미가 예능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방향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서로에게 예의와 매너를 지켜야 한다.


다만 그 근간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행위가 아니길 바란다. 그것은 또 다른 무례함과 비겁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공 교육 받은 밀레니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