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나는 변화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금 이 찰나의 순간에도 나의 몸은 살아있어 활동하고, 그 생명의 움직임은 변화를 만든다.
변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발생시키는 변화와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변화.
이 세상의 누구든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나서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단 한순간이라도 변화 없이 살아온 적이 있던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이 있다. 그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자연도 그러할진대,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기분이 다르고 컨디션이 다르고,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어갈수록 달라지는 연약한 신체에 갇혀 역동적인 생물학적 활동을 이어가는 인간은 오죽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변화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다. 오래 살고 나이가 먹을수록 더하다. 오래 살면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변화를 체험했을 텐데 점점 더 안정을 추구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반대로 젊은이들은 변화를 덜 두려워한다.
'덜'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젊은이도 대부분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저 익숙함을 선택하고 새로운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것. 어쩌면 변화를 많이 경험할수록, 그 변화가 내게 고단함을 가져왔기 때문에 안정을 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쉴 새 없는 변화의 굴레 안에서 존재하기에 오히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에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로.
진화생물학적 관점에 따르면, 모든 생물은 변이라는 변화를 일으킨다. 변이라는 것은 사실 비정상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정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새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히 무작위적이고 확률적으로 발생한다. 이 무책임해 보이는 말은 방향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변이가 추구하는 방향은 단 한 가지이다.
생존.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생하는데 그것이 생존의 핵심이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능력. 그것은 어떤 의지도 함유하지 않는다. 그저 변화에 반응하여 새로운 모습을 탄생시킬 뿐이다. 거기엔 의식적인 창조도 도덕도 관념도 없다.
만약 나를 진화론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 살면서도 무언가 고정된 것을 추구함은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내적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생물이 생존에 유익한 변이를 유발하는 것은 분명 철저히 계산된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불변의 방향성이라 부르고 싶다.
고정된 방향성을 갖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의 흐름 속에 의식을 놓은 채 나를 맡겨버린다면 환경에 무작위적으로 무차별적으로 변화되는 변이 주도의 메커니즘에 지배당하다 도태의 길을 걷게 된다.
작은 하나의 유전자 변이는 생물의 표현형에 변화를 못 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의 축적은 결국 가시적으로 발견되는 완전한 변형을 일으키게 된다.
오늘도 해는 뜨고 사람들은 일을 한다.
누군가는 같은 일을 무료하게 반복적으로.
누군가는 더 빠른 변화에 주목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