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번개가 무시무시했던 새벽이었다. 번개에 잠을 설친 첫째가 비실비실 내 침대로 다가왔다. 자기 방에서 같이 자자는 아이와 시계를 번갈이 보다가 결단을 내렸다.
"괜찮아... 이제 천둥 끝나 간다...얼른 가서 다시 자... 엄마 좀 있으면 일어나서 나간단 말이야..."
때는 새벽 4시 반. 미안하지만 엄마는 30분 더 편히 잘 수 있는 가능성을 놓고 싶지 않았다. 토닥토닥 아이를 달래 보내면서 비몽사몽 아이 방에도 암막 커튼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 번개가 이렇게 치는데 30분 후에 과연 차를 타고 갈 수 있을까 생각.. 번개에 맞지는 않겠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까무룩 다시 잠 속으로...
그래서일까.
오늘 새벽 수영의 수강생이 확 줄었다. 호르라기 구호에 맞춰 준비운동을 하면서 진짜 이게 다인가?싶게 적은 동료들을 보니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아 기특한지고 나 녀석. 폭우를 이기고 나왔어... 비록 나오는 시점에 비는 멈췄지만.
그러나 제정신은 아니었나봄
키판을 잡고 음~파 두 바퀴 도는 걸로 수업을 시작했다. 선생님이 나에게 머리를 더 집어 넣어야 한다고 하셨다. 이마가 푹 들어가야 한다고. 이마까지 담기면 귀는 어쩌지. 아아... 나는 일단 수영을 하기 전에 귀에 물이 들어가서 고막이 물에 잠길 것 같은 이상한 상상을 그만 해야한다. 그런 일은 거의 없잖아. 그치? 없지 없잖아? 없겠지??? (없습니까??)
모자로 귀를 최대한 덮어본다. 처음에는 모자가 물을 막아주는 것 같았는데 한참 지나니까 그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고무 같은 재질의 모자가 있는 것인가. . .수업 시작 전 잠깐 수다를 떨었던 60대 어르신이 귀마개 같은 걸 하고 있는 걸 보고 좋아보인다 싶어서 나중에 물어보려 했다. 그 분이 귀에서 피를 흘리며 중간에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 .
그만. 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수영을 배우는 데 있어서 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귀에 대해서 더 이상 의식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보다 오늘의 주제는 허벅지다. 오늘 드디어 발차기를 배웠다.
무릎을 펴고 발끝을 쭉 펴고 발차기를 한다. 무릎 아래 다리를 움직이는 게 아니고 엉덩이와 허벅지 힘으로 마치 가위처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한 번에 1분씩 다함께 발차기를 연습한다. 앉아서, 엎드려서, 천천히, 빠르게, 여러번 반복. 제대로 발차기를 하면 물보라가 얼굴을 덮치지는 않는다. 물 위가 아니라 물 속을 젓는 것에 집중하면 말이다. 이 때 제일 아프고 아파야 하는 곳은 허벅지다. 허벅지가 일을 하고 있다!
비루한 나의 운동 경험을 되돌아 봤을 때 허벅지는 언제나 중요한 부위였다. 요가와 필라테스 몸살림 운동에서도 중요한 건 단연코 코어근육, 골반과 허벅지의 힘이었던 것. 은밀한 몸의 제왕 같은 느낌이랄까..몸 중에 예쁜 얼굴이 최고라 생각하는 건 인생을 잘 모를 때나 그렇다. 어른들은 허벅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삶의 질은 허벅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허벅지가 굵고 튼튼해야 건강한거라는 엄마 말은 저주 같았는데 지금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어렸을 때는 허벅지가 두꺼워 보이는 게 싫어서 앉을 때 살짝 허벅지를 바닥에서 떼고 있었다. 그런 내가 지금은 말랑하고 얇은 나의 허벅지가 더 이상 예뻐 보이지 않는다. 멋진 허벅지란 무엇이냐, 앞으로 불룩 튀어나온 근육이 붙은 허벅지다. 그런 여자들을 보면 멍해진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다.... 멋지다 멋지다 멋지다.
허벅지의 힘. 얼마 전 나는 하현 작가님의 책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에서 인생의 롤모델을 발견했다. '옆집의 인싸할머니'로 등장하는 한 부유하고 명랑한 할머니다. 그녀는 허벅지와 췌장이 건강해서 나이와 상관없이 먹고 싶은 건 다 먹을 수 있다. 수박바가 다 녹기 전에 12층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그녀의 허벅지는 두껍고 단단하고 빛이 난다. 그런 인생,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살수록 느끼지만 확실히 인생은, 단단한 허벅지가 전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