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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pr 14. 2022

주말입니다

2022년 3월 20일

당신에게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주말의 오후 두 시는 평범하게 느슨합니다.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거나, 이웃에 사는 동료와 낮술을 즐기기도 하고, 과일을 수북하게 깎아 테라스에서 햇살을 쬐며 먹기도 합니다. 슬리퍼를 찍찍 끌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나가서, 급하지 않은 업무를 느긋하게 처리할 때도 있습니다. 사무실은 집에서 걸어서 오 분 거리입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나의 생활은 집과 회사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을 아파트 단지 안에서 보내는 편입니다. 안전과 위생이 보장된 주거공간은 아프리카 외노자에게 중요한 근로 조건 중 하나입니다. 단지 내 환경은 쾌적하고 조경은 어딘가 인공적이지만 아름답습니다. 열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산책로는 깨끗하고, 전기가 끊겨도 금방 발전기가 돌아갑니다. 무엇보다 출입구마다 지키고 있는 경비 덕분에 안전합니다. 단지 곳곳에선 인부들이 아파트 로고가 찍힌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흠없이 깔끔한 건물과 근사한 조경이 유지되는 이유이겠지요.


단지를 벗어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걸어서 삼십 분이면 마트에 갈 수 있지만,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습니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입니다. 그래서 택시를 탑니다. 말이 택시이지, 시트는 더럽고 문고리도 없는, 조그만 고철덩어리이지만 말입니다. 마트로 향하는 길, 차안으로 밀려드는 매연과, 신호등도 차선도 인도도 없는 위험한 도로와, 차창에 붙어 구걸하는 아이들과, 언젠가 새 것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은 낡은 노점상과, 조악한 생활용품을 들이미는 행상들을 보면,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입니다.


언젠가 '생활은 어때?' 하고 안부를 묻는 친구에게 '세계의 불평등을 실시간으로 체험 중이야'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가끔 거대한 스노우볼 속에 살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투명한 유리벽을 사이에 둔 채 반대편의 가난을 전시관처럼 바라보는 내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런 선택도,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스노우볼을 깨고 바깥으로 나갈 순 없는 유약한 나를 발견합니다. 내가 누리는 생활의 안온함에 늘 죄의식이 동반되는 이유입니다.


코로나와 태풍, 빈곤과 부패와 사회 불안... 스노우볼의 바깥이 험하고 어려워질수록, 유리벽 안쪽의 삶은 더욱 안전해지겠지요. 경비는  삼엄해지고 대비는 더욱 철저해질테니까요. 내가 보는 것은 다만 수도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기근과 재해와 질병과 싸우는 남부의 사정을 생각하면, 괴리감은 말할  없이 커집니다. 처음 느끼는 복합적인 기분입니다. 활자로만 읽었던 가난과 죽음의 참상이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나의 태생적 한계는 무력감을 낳고,  한편으로는 이런 시선으로 현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가(correctness) 대한 열이 나를 어지럽게 합니다.


내일 모레면 이곳에 온 지 딱 한 달이 됩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를 알고 나면, 알기 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겠지요. 그게 나를 조금씩 변하게 만드리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던 오후  시였습니다. 편지가 많이 길어졌네요. 부디 당신의 주말이 편안했기를 바랍니다.


2022년 3월 20일

사과나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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