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나무 Oct 16. 2023

이런 낭만을 꿈꿨던 건 아니었습니만

2023년 10월 16일

당신에게


2000년대 초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는 졸업할 때까지 문학회 활동을 했습니다. 동아리방에서 보낸 시간은 내 자아의 팔 할을 형성했던 이십 대의 핵심이었습니다. 동기, 후배들과 옛날 시집을 돌려 읽고, 과제를 한다는 명목으로 밤새 수다를 떨고, 옹기종기 모여 합평을 하고, 시화전과 문집을 준비하고, 방명록도 끄적이던 호시절이었습니다. 늘 동아리방을 열 때면 오늘은 누가 있을까, 이상한 기대감으로 늘 문을 열었던 기억이 있네요.


돌아보면 추억과 향수로 가득한 시절이었는데요, 막상 그 때의 나는 왜 이렇게 낭만이 없을까? 늘 생각했습니다. 내가 막연하게 품었던 대학생활의 낭만이란, 7080의 낭만이었기 때문입니다. 혁명을 꿈꾸고 독재와 불의에 뜨겁게 항쟁하며 거리로 뛰어드는 그런 대학생의 이미지가 뇌리에 깊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2000년대에도 분명 시대의 불행은 있었지만, 그 시절의 내가 꿈꿨던 낭만은 좀 더 드라마틱한 비극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와 대학시절의 낭만을 재소환하는 이유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지내며 시대의 불행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생활 곳곳에 깃든 사회 불안을 겪으며, 대학 시절 꿈꾸었던 낭만은 철없는 판타지일뿐, 현실은 그보다 막막하고 두려운 것임을 시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무척 불안한 정국을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 초부터 급격히 치안이 나빠진 것에 이어, 요즘엔 여당 후보자와 야당 후보자 연대 사이에 작은 소요들이 시시각각 생중계 되고 있죠.


지금까지는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마트에 걸어서 장을 보러가기도 했습니다만, 요즘엔 외출을 자제하는 편 입니다. 치안이 너무 나쁜 탓에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낮에 사람이 많은 대로에서 노상강도를 당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어두운 밤, 인적이 드문 거리 등 상식적으로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맥락이 아닌, 생활의 영역에서 안전을 위협당하니 이건 정말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지인 직원들조차 몸을 사리는 상황이라, 외국인인 저로서는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요.   


한 달 남짓 남은 대선은 불안을 한 스푼 더해줍니다. 마다가스카르는 1958년 프랑스로부터 60년 만에 독립했지만, 안정적인 정치 체계를 수립하는데에는 실패했습니다. 크고 작은 쿠데타가 반복되었고, 2014년이 되어서야 민주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는 데 성공했죠.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만큼, 2023년의 대선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 보입니다. 마다가스카르의 정치 이야기라면 밤새 썰을 풀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다음 기회에 들려드릴게요.


아무튼 12월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아슬아슬한 사회 분위기는 계속 될 것 같아요. 또 한 번 쿠데타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전망에 불안은 더욱 깊어집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다보니, 내가 먹고, 자고, 일하는 세계가 공고한 민주주의 위에 구축되어 있고, 기본적인 치안과 보안을 보장 받는 시스템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가끔은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인데, 기실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이 없었다니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다가스카르도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일테고, 언젠가는 지금의 불안을 힘든 시절로 회상할 날이 오겠죠.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시대의 불행이 결코 낭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쿠데타와 강도의 위협이 내 세계의 지척에 있다는 게 얼마나 두렵고 갑갑한 일인지 체감하는 중이네요. 다음 번엔 조금 더 안전한 안부를 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오후 두 시를 보내고 있을까요? 어디에 있든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2023년 10월 16일

사과나무 드림     

매거진의 이전글 잘 뛰고 잘 먹고 잘 잡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