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온도를 존중하는 법
언니가 대화방에서 사라졌다. 카카오톡 대화방에 있던 언니의 이름이 ‘알수없음’으로 되어 있었다. 까맣게 되어버린 프로필 사진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손가락을 굴려 언니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다보니, 문득 언니가 속세를 영영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2년 전 언니가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나는 언니의 결정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니는 이미 수도원에서 7년을 보낸 경력직(?)이었고, 삶이 종교에 젖어 있는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예상했던 결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니에게 면회를 갈 수 있느냐 물었고, 언니는 내게 수도원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이별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뭐랄까... 영원한 이별이라기 보다는 친구를 군대에 보내는 기분에 더 가까웠다. 최근 몇 년 간 해외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었던 우리는 시기와 상황에 맞춰 드문드문 얼굴을 보는 편이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동안 파리에 자주 놀러 갈 계획이니, 파리에 갈 때마다 수도원을 찾아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파리에 가려면 아프리카 대륙을 14시간이나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도, 내게 주어질 휴가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땐 몰랐다.
언니는 내가 마다가스카르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프랑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언니는 떠났지만 언니와의 카톡 대화방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언니가 카톡을 보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끔 메시지를 남겼다. 생일을 축하한다고 썼고, 행복한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썼고, 힘들다고 썼고, 언니가 많이 그립다고 썼다. 물론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그렇게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중, 지난 1월쯤 언니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왔다. 너무 반가워서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언니는 카톡을 자주 확인하지 못 하니, 필요하면 메일을 쓰라며 메일 주소 하나를 보내주었다. 그 후로도 나는 가끔 카톡을 남겼고, 언니는 긴 텀을 두고 가끔 답장을 해 주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쓴 카톡은 언니에게서 답장이 오면 전쟁터에 나간 남편 소식을 듣는 것처럼 기쁘다는 문장이었다. 그 메시지를 끝으로 언니는 돌연 카톡에서 사라졌다.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심정이었다. 언니가 수도원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언니를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언니에게 보낸 메시지를 읽으며,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 메시지가 언니에게 속세에 대한 미련이나 기대를 주었을까? 그래서 언니의 수행에 방해가 되었을까? 그래서 떠나버린걸까? 언니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언니의 선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니가 사라진 자리에서 관계의 온도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관계는 두 사람의 몫이고, 두 사람의 온도가 늘 같을 수는 없다. 나는 언니를 닿을 수 있는 곳에 두고 뜨겁게 보고싶다고 말하고 싶지만, 언니가 원하지 않는다면, 언니를 향한 나의 온도는 온기도 사랑도 아닌 그저 부담일뿐일 것이다.
언니가 카톡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언니의 세계에서 내가 사라진 것은 아닐 거다. 다만 언니는 내 안부에 뒤늦은 답신을 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쪽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언니의 온도에 맞춰, 내 온도를 조금 낮추어본다. 그럼 우리 관계의 항상성은 유지될 것이다. 그래도 언니가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어쩔 땐 90살 먹은 지혜로운 현자같다가도, 어쩔 땐 9살 먹은 떼쟁이처럼 순수한 언니가 보고 싶다. 그러니, 오늘 밤에는 나도 언니를 위한 기도를 할 것이다. 언니의 생활에 신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