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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Dec 28. 2023

#60. 낡은 일상을 새롭게 닦으며

2023년의 마지막 기록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내는 두 번째 연말이다. 두 번째라고 해서 뜨거운 크리스마스와 그보다 더 무더운 연말이 덜 생경한 건 아니다. 12월은 추워야 맛인데 말이다. 오늘은 마지막 남은 연차를 털어쓴 날이다. 회사에 가지 않았다. 오전 아홉 시, 한 해를 정리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지난 시간을 돌아보다가 새삼 어이가 없어진다. 이 가난하고 아름다운 동아프리카 섬나라에서 또 한 해를 보냈다니. 여전히 나는 이 모든 게 현실같지 않다.


길었던 한 해였다. 대부분 회사-집을 오가는 단순한 날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일터에서 수고가 많았다. 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어서, 일이 버거워 울기도 했고, 잔뜩 예민했던 날도 있었다. 주말 잔업이 지겨워 미루고 미루다가 일요일 저녁에야 끌려가듯 회사로 향했던 날도 있었다. 올해의 특이점이라면, 일터 안팎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사람이 싫어 괴로웠던 적도 있었고, 사람 때문에 오랜만에 설레기도 했던 것 같다.


일을 뺀 나머지 생활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요즘도 그렇다. 생활이 익숙해진 자리에 금세 권태가 들어찬 것을 보며, 일상은 왜 이리도 쉽게 낡는걸까 생각했다. 파리에서도, 몬트리올에서도,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변화된 환경의 신선함은 금방 사라지고, 반복된 생활 끝에 결국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나는 억지로 이것저것을 시도하며, 낡아 버린 생활을 새 것처럼 만들어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다.


무기력 타파의 일환으로 올해는 한국에 두 번 다녀왔고, 방콕 여행을 했으며,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만, 공항이 폐쇄되는 바람에 비행기와 숙소를 취소해야 했다. 강아지 입양을 결정했다가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 뺑오쇼콜라가 맛있는 가게를 찾았고, 발품을 팔아 테라스에 테이블과 의자를 들였으며, 자주 쓰던 향수를 바꾸었고, 아주 많은 망고와 자두와 수박을 먹었다.


다행인 것은 무기력과 싸우는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내게는 생활의 동반자 지선이 있었다. 전우가 있다고 권태와의 전쟁에서 늘 승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함께, 자주 졌다. 배드민턴은 치다가 곧 그만두었고, 달리기는 내일로 미루게 되었으며, 루미큐브는 시들해지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게임은 둘이 하는 부루마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무기력에 철저히 패배하여, 주말 내내 각자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뙤약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퍼져있는 날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다가올 새해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상은 한 해만큼 더 낡을 것이고, 나는 권태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똑같이 애쓸 것이다. 새로운 보드게임을 사들이고, 다이어트를 하고, 집안의 인테리어를 바꾸거나, 새로운 식당을 탐색하며 말이다. 그러다 또 패잔병이 되어 늘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 툭툭 털고 일어나 다음 휴가지를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늘 이기지 않아도 좋으니, 반복되는 이 싸움에 부디 지치지 않기를. 낡은 일상을 새롭게 닦으며, 힘차게 새해를 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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