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요?
예전에 나는 지적으로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되게 강했어.
중학교 때 우리 집에 오래된 책들이 많았어. 그중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있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그걸 학교에 들고 가서 내용도 모르는데 그냥 읽었어. 그걸 담임선생님이 보시더니 놀라워하시는거야. 되게 우쭐했었어. 근데 중요한 건 난 그 책 내용을 전혀 이해를 못 했고 처음에만 조금 읽다가 관뒀다는 거야. 근데 나중엔 오히려 선생님이 그걸 가지고 화를 내시더라고. 왜냐면 내가 처음엔 똘똘한 학생처럼 보였겠지만 성적이나 교우관계에서 실속이 없는 사람이라는 게 모조리 들통이 난 거야. 그래서 그때 되게 부끄러웠어.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어머니께서 “너 대체 학교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하고 물어보시는 거야. 내가 “저 잘 다니고 있는데요.”라고 했더니, 담임선생님이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아이가 혹시 자폐가 있나요?”라고 질문을 했었대. 그걸 듣고 난 좀 충격받았어. 그때 나는 그만큼 허영심이 되게 강했어. 실제로 그런 능력은 없었지만 그래 보이고 싶었어. 20대 초반 중으로 어느 정도는 나아졌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걸 걷어내니까 내가 좀 보이더라고. 결국 남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가 엄청 중요했던 거지.
- 가족 중에 동생들이 많은데, 만약 동생이 적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 생각 엄청 많이 했어. 그리고 그때마다 항상 죄책감이 동반될 수밖에 없어. 세상에 있는 내 동생들을 없다고 생각을 해야 되니까.
어렸을 때 그림 그리는 거 되게 좋아했는데, 타블렛을 사게 된 이유가 사실 동생들 때문이 컸어. 왜냐면 종이에 만화 같은 거 그려서 쌓아놓으면 항상 동생들이 낙서하고 찢고 그랬었어. 고등학교 때는 EBS 교재 표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서 낙서를 해놓는 거야. 그런 게 너무 싫었어.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서 타블렛을 샀어. 컴퓨터에 그림을 보관하면 동생들이 내 그림을 훼손할 걱정을 안 해도 되잖아.
- 언제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나요?
8살 때 친구들끼리 서로의 미래 모습을 그려주는 시간이었을 거야. 내가 친구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는데 담임선생님이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나. 내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것도 그 칭찬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 어렸을 때 선생님한테 들었던 말이 이렇게 영향이 클 거라고 생각을 안 했는데,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계속 남아있는 기억이 있어.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한테 혼난 적이 있다고 했잖아. 그게 엄청 나한테 강렬한 경험이었나 봐. 지금 생각해 보면 고마운 일이기도 하겠다. 항상 정신 차리게 해주는 거지. 내 기억 속에 있던 선생님이 가끔씩 나타나서 ‘너 까불지 마라. 진짜 아는 거 맞아?’하고 호되게 혼내주시는 거지. 전에 비해 인정을 잘하게 됐어, 변명 덜 하고.
-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조그만 광고 대행사에 다니고 별로 바쁘지 않고 월급은 적지만 이 정도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니고 있어. 그리고 토익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예전엔 토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했었어. 왜냐면 점수가 안 나올 것 같아서 무서웠어. 예전에 이런 식으로 되게 바보같이 살았어. 그런 태도로 인생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번 시험을 꼭 잘 보고 싶은 이유는 여기서 만족할 만한 점수를 받으면 자신감이 생길 거 같아. ‘나도 하면 되긴 하는구나’ 하는 자신감을 너무 갖고 싶어. 한동안 자격증이나 시험처럼 점수 매기는 걸 너무 싫어했어. 그런 걸 피해 다니다 보니까 남들한테 나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때 스스로도 어려운 경우가 있더라고. 나에 대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싶은 거지. 시험 점수 같은 건 그중에서도 아주 좁은 의미의 얄팍한 것이지만 하나씩 가져보고 싶어.
지금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졌어. 더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싶고, 이것도 되게 얄팍한 거지. 내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공부라기보다는. 회사 일을 하면서 뭔가 많이 배운다는 생각이 안 들다 보니까, 예전에 얄팍하게나마 쌓아놨던 거 가지고 밑천도 없는 상태에서 항상 비슷한 것만 뽑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게 싫었어. 난 내 상태에 만족을 못 해.
그리고 아쉬운 마음도 좀 드는 게 ‘내가 전공을 너무 진지하지 않게 대했나’하는 생각이 들거든. 전공자인데도 일반인들이 디자인이나 예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들을 나조차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감각이 중요한 거 아니야?’ 약간 이런. 제대로 해볼 생각을 안 했던 거야. 분명 기초나 기본이 있고 디자인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야 했는데 그런 것도 다 졸업하고 나서 관심 생겨서 찾아보게 됐거든. 지금 얘기하는 것도 기본이나 기초에 대한 집착인 거지. 뭘 하든 항상 토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계속 해. 앞으로 뭘 하든 대충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절실히 해.
-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나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걸 쭉 돌이켜보면 자연스러움이랑은 거리가 먼 것 같아. 나는 ‘흐르는 대로 살라’는 말, 진짜 실천 못하거든. 흐르는 대로 살도록 내가 못 내버려 둬서, 힘 빼고 맡기면 마음에 드는 곳에 못 갈 것 같은 느낌.
‘내가 여기보다는 더 나은 곳에 있을만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 근데 이 말이 비참해지는 게 같이 있기 싫은 사람들하고 내가 결국 같은 수준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중에 잘 되면 그 사람들한테 “예전의 내가 아니야.”이런 거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지. 유치한 마음이지만 강력한 동기야.
나는 기복이 심하고 굴곡이 많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모험을 하기 싫다는 말이랑은 조금 달라. 비장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아. 언제부턴가 ‘간절함’이나 ‘필사적인’ 이런 말들에 염증이 나. ‘여기서 뭘 더 얼마나 해야 하는데’이런 생각.
나는 지금 인터뷰한 것보다 훨씬 속된 사람인데, 속된 성공을 많이 만끽하고 그게 별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싶어. 그것들에 엄청나게 가치를 부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무 갖고 싶고 누려보고 싶어. 누릴 것 다 누려보고 별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한번 갔다 오고 싶어(웃음). 다 경험 해보고 나면 진정으로 미련 없이 소박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별거 아닌 걸 아니까. 내가 지금 경험의 폭에 집중하는 게 그래서 그런 것 같아. 다 해봐야 아니까.
- 당신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나요?
떠오르는 대로 얘기해 보면, 내 의지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의무감인 것 같아. 생존의 문제. ‘이렇게 안 하고 나중에 어떻게 살려고, 너 지금 네 능력 가지고 잘 살 수 있겠어? 동생들도 많은데, 가족들도 있는데.’ 나는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애초에 안돼. 부모님께서는 우리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전혀 그런 생각 안 들지. 난 크게 한 턱 벌어서 가족들 걱정 없애주고 싶어.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어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