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나요?
평범하게 무난한 코스를 밟으며 살아온 것 같아요. 어릴 때는 공부하라니까 했고, 대학 가라니까 갔고, 자리를 잡아야 하니까 취직을 한 느낌. 그렇게 살아온 와중에 만난 사람들이 저를 잘 이루어줬다고 생각해요. 무너질 때가 많은데 사람으로 메꾸듯이 살아온 것 같아요. 저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으면 '이 사람은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으로 생각하고 끝내려고 노력해요. 이미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굳이 그런 사람한테 애정을 더 줘야 하나 싶어요. 많이 부딪치면서 일찍 깨달아서 그렇게 살려고 하고 있어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느낌을 받아요.
원래 사람은 이름대로 살아간다고 하잖아요. 제 이름이 펼 서자에 길 영자를 써요. 길한 기운을 널리 퍼뜨리라는 뜻이에요. 얼마 전에 친구가 너는 그 뜻대로 잘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준 말이 딱 와닿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어요.
- 원래 미술을 하고 싶었나요?
저는 원래 공부만 했었거든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 문제를 푸는데, 이걸 2년 동안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끔찍한 거예요. 그때 엄마한테 말씀드리고 예체능으로 전환했어요. 딱히 큰 이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인생에서 큰 선택을 할 때, 깊이 생각하지만 결국 정하는 이유는 단순하거든요. 생각은 하는데 그게 모든 것들을 뒷받침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냥 그림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해서 미대에 갔어요.
휴학했을 때 마침 페어 쪽에서 일하는 선배들 권유로 캐리커처 작가를 한 게 기점이었어요. 그때 제 그림을 좋다고 한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어요. 저는 고양이랑 강아지 보는 걸 좋아하는데, 다른 집 강아지나 고양이를 합법적으로 보면서 돈도 벌 수 있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조금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직장 다니면서 하는 취미 정도로 여기고 있어요.
저는 웬만한 것에 진지해요. 제 그림은 단순한 도형 위주라 제 기준에선 잘 그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만든 것들이 탄탄하다는 생각은 잘 안 해요. 근데 고민은 많이 해요. 특히 페어에서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그걸 돈 주고 사는데 열심히 안 할 순 없잖아요. 전 그건 진짜 소비자 기만이라고 생각하거든요(웃음). 그 돈은 대체 어디서 났겠어요. 저처럼 일해서 벌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막 만들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하죠.
저 검도 진짜 열심히 해요. 제 목표는 1단 따기. 주에 거의 4회 이상 가요. 단을 따면 협회에 등록이 되거든요. 그게 하고 싶은 거예요(웃음). 처음에는 힘드니까 주 2~3회 가다가, ‘조금만 더 하면 저 사람 따라잡을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으로 그때부터 열심히 하고 있어요.
-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최근에 느끼는 건데, 취향이 단단해지는 시기를 겪고 있어요. 그전까지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았는데 지금은 좋아하는 걸 잘 모아서 조금씩 책으로 묶어나가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제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무서워해서 엘리베이터도 잘 못 타거든요. 작년 8월쯤에 이상 기후 때문에 비가 많이 왔었잖아요. 그때 엘리베이터를 도저히 못 타겠는 거예요. 집이 13층인데 걸어 다녔어요. 어릴 때부터 지구온난화라는 단어에 되게 민감했거든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서 그렇게 내 삶을 마감한다는 게 무서워요. 그래서 환경에 대해 집착하다시피 노력해요. 고기 안 먹으려고 노력하고 텀블러도 매일 쓰거든요. 저는 원체 삶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어렸을 때 겪었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두려워요. 가령 미세먼지가 없으면 길 가다가 친구들이랑 하늘이 예쁘다면서 호들갑 떠는데 앞으로는 못 볼 수도 있잖아요.
불안해질 때는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려고 노력해요. 그게 저한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주변에서 왜 텀블러를 쓰는지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고, 들고 간 포장 용기에 담아서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면 싫어하는 사람 거의 없어요. 그런 조그만 반응들에서 만족감을 얻고 있어요. 오히려 나쁜 기사는 안 보려고 해요. 나는 나름 이렇게 실천하고 있는데 그런 걸 보면 제 삶이 무너질 것 같아요. 작년부터는 환경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조금씩 불안을 잠재워나가는 거죠.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해요. 어떻게 보면 그냥 대가리가 꽃밭이죠(웃음). 좋은 것만 보려고 하니까. 근데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정한 걸 지킬 수 있다면, 저한테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누군가가 제게 ‘그때 왜 행동하지 않았어?’라고 하면, ‘난 행동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엄격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캐릭터나 굿즈를 제작할 때도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환경에 해가 없는 걸 쓰려고 해요. 제작소 중에 전부 친환경으로만 제작하는 곳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작업하는 게 제 목표예요.
-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나요?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전 지금 딱 좋아요. 물론 고민이나 힘든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제가 잘 정리된 것 같아서요. 이전에는 뭘 좋아하는지 잘하는지도 몰랐는데 20대 중후반쯤 되니까 조금씩 정해지는 것 같아요. 고민 다 끝내서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 더 많아요. 목표는 년 단위로 짧게 잡아서 올해도 정해놨거든요. 그냥 그렇게 살 거예요. 작년에 적어놓은 것도 거의 다 이뤘거든요.
전 끈기보다는 오기가 있는 것 같아요. 뒷심이 없어서 엄청난 초상화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낙서로 끝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어떻게든 끝내려고 노력해요.
저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무서워서 눈앞에 닥친 걸 헤쳐 나가다 보면 미래에 도착해있을 거로 생각하기로 했어요. 당장 고민해도 해결되지 않고, 그냥 미리 고민한 사람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전 답답하고 힘들면 냅다 나가서 뛰어요. 재작년에, 집에 갈 때 되게 막막했거든요. 계약직이라 퇴근하고 집 오면 너무 늦은 시간인데, ‘이걸 한평생 해야 한다고? 이렇게 재미없는데? 와 답이 없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그 상태로 집에 가기 싫어서 한 시간 정도 걸어갔어요. 좋아하는 음악 듣고 배고프니까 음료랑 빵 먹으면서. 빠르게 걷다 보면 단순해져요. 그래서 저는 힘들면 운동하려고 해요. 검도하면 검 휘두르는 데 집중하니까 단순해져요. 정신 수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사람인 것 같아요. 저는 영감도 사람으로부터 얻고 힘든 것도 사람으로 잊어요.
작업할 때 사람을 그리지 않는 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안 나와서예요. 캐리커처 그릴 때 어떤 분이 “이게 저예요?”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혹시 수정하실 부분 있을까요?” 이러니까 “됐어요.”라면서 가시는데, 그 일에 상처받았어요.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안 그려줘요(웃음).
그래도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럴 거라고 믿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