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다른 SNS를 사용할 때도 사실 굳이 장애, 발달장애에 대해 찾아보지 않는 편이다. 처음 별이가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을 무렵 몇 달을 밤새서 검색만 하고 살기도 했었다. 얼마 전까지도 가끔 들어가는 발달장애 아이들의 엄마들 커뮤니티에 가면 내가 예전에 지나온 비슷한 고민과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글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오지랖으로, 댓글 달고 더 찾아보고 하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런 시간이 반복될수록 지치고 피로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한동안은 '장애'라는 단어를 멀리하고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막 아이의 발달장애를 인지한 사람들의 거기서 거기의 고민보다는, 좀 더 장애 있는 아이들을 키워낸 선배맘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정보의 바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만해도 별이가 특수학교에 들어간 이후의 이야기는 그다지 온라인상에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은 물론 계속되고 있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들은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 별이가 아직 어렸을 때처럼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일도 줄었고, 때론 속상하지만 그러려니 하며 조금은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즈음의 별이의 이야기는 비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공감하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장애와 비장애가 아이 앞에 나타난 갈림길처럼 보였어도, 이제는 발달장애 아이와 비장애 아이가 걸어가는 길 사이의 거리는 꽤나 멀게 느껴졌다. 장애가 없는 큰아이 봄이를 키우며 하는 고민과, 둘째 별이를 키우며 생기는 고민은 그야말로 결이 달랐다. 봄이의 영어, 수학 학원과 또래친구들과의 사회성을 고민하다가도, 별이의 잦은 상동 행동과 완벽한 배변 자조기술을 함께 고민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튜브에 들어간 김에 작정하고'자폐성 장애'를 검색해봤다. 5세 무렵 지적장애 3급으로 장애판정을 받은 별이의 재판정 시기가 내년으로 다가왔다. 지적장애지만 자폐스펙트럼 내에 있다는 진단 결과처럼, 커갈수록 자폐성향이 짙어지는 별이었다. 재판정을 자폐성 장애로 받으면 적어도 장애인 주차구역이라도 이용할 수 있었다. 지금의 지적장애 3급 판정은 별이를 키우는데 그다지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가 어릴 때에는 '제발 자폐만은 아니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9살이 된 지금에는 자폐 건 지적장애 건 타이틀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버린 지 오래되었다. 장애 진단명이 무엇이건 우리 아이는 사회에서 온전히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가지고 있다. 그걸 명칭을 뭐로 쓴다한들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애써 외면하고 숨길 필요 없이 치료하고, 장애등급을 받아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다 받고 살아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우리 아이의 장애에 대해 굳이 숨기지도, 축소하지도 않으려고 하고 있다.
유튜브를 돌아다니다가 내가 발견한 것은 '우리 아이 연구소'라는 한 채널이었다. 자폐성 장애아를 키우는 세엄마가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상담해주는 곳이었다. 이미 성인이 다된 아이들을 키워낸 엄마도 있고, 어떤 엄마는 언어치료사이기도 했다. 아이를 키워내고 나서 뒤돌아보니 깨달은 것들을 나누고 조언해주는, 바로 내가 찾던 선배맘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콘텐츠였다.
구독을 하고 영상을 하나둘 시청하다 보니 왜 내가 어느 시점 이후로 담담해졌는지, 자격지심이 줄어들고 아이의 장애를 공개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장애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장애를 처음 마주하는 엄마들의 마음속은 지옥과도 같다. 아이는 아직 어릴 거다. 어쩌면 장애가 아니라 그저 늦된 아이일 뿐일 거라는 끝도 없는 희망고문에, 내가 노력하면 아이는 좋아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엄마는 아이 손을 잡고 여기저기 좋다는 의사와 치료실을 전전하며 매일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는다.
몇 년 정도 그런 기간을 거치고 나니 내 경우에는 현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었다. 계속 그렇게 살기에는 큰아이 봄이의 희생이 너무 컸고, 별이의 상호작용은 이미 일반 아이들에 비해 확연히 떨어졌었다. 별이를 유치원 특수반에 보내고 거기에서 특수반 엄마들과 교류하며 나는 많이 치유됐었던 것 같다.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 너무 외롭고 무서워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치료사와 의사 등 여러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한몫했다. 글쓰기와 덕질 같은 요소들도 내 자존감 회복과 우울감 퇴치에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서서히 해탈과 비슷한 묘한 감정을 느끼며 서서히 웃음을 되찾았었는데, 그게 내게는 '장애수용'이었던 거다.
사람마다 장애수용의 시기는 다르고, 이러다가 나도 또 어느 날 억장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별이가 비장애 아이와 같아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남들과 조금 다른 형태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별이와 나를 위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커갈수록 미처 예측하지 못한 문제점은 계속 생겨난다. 하지만 삶은 이어지고, 우리는 계속 걸어 나가야 한다. 특히나 나와 별이에게 삶은 긴 마라톤이다. 날이 선 상태로 가슴만 아파하며 살아가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다.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삶을 두발로 걸어 나가며 우리 몫으로 주어진 행복을 찾아가는 게 내가 선택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