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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piration Apr 07. 2019

시드니 비행 일기

조용한 삶의 정물화

 시간 여유가 있는 스테이에 가면 공원이나 미술관, 카페, 이 중 한 곳은 꼭 들르는 편이다. 가고 싶은 장소들을 지도에 표시해 놓은 것을 보면 어느 나라든 이 셋은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들이 내 취향의 교집합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일부러 찾아가곤 한다. 무언가 채우고 싶은 날에는 미술관에 가서 새로운 작품들을 본다. 반대로 무언가 비우고 싶은 날에는 대개 공원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때론 비어있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왠지 머릿속이 복잡할 때, 혼자만의 시간이 갖고 싶을 때, 무언가로 가득 차 마음이 부글부글 터질 듯이 끓는 냄비 같아질 때. 그런 순간이 오면 공원으로 향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공원에 앉아 머무르는 시간은 늘 잔잔했고 평화로웠다. 책 '여행의 이유' 속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나는 노바디의 존재가 되어 흘러가는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앉아 세상을 바라보기에 공원만큼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 심지어 아무런 준비물도, 비용도 필요하지 않다. 아, 꼭 필요한 것이 있긴 하다. 너무 춥지 않은 날씨와 파란 하늘 정도.



 햇빛이 유난히 노랗던 시드니에서의 어느 날, 어김없이 공원을 찾았다.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켰을 법한 큼직한 나무의 옆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고는 오는 길에 카페에서 산 진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휴대폰은 잠시 내려두고 이곳의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던 할머니, 그냥 잔디에 누워 일광욕하던 남자, 자전거를 타다 쉬어가던 소년, 캐치볼을 하던 아빠와 아들, 반려견과 산책하던 연인, 친구와 담소를 나누던 사람.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모습으로 공원에 머무르고 또 지나가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다들 이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 이런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그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풍경에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기분 좋은 여유를 만끽하며 내 앞의 가까운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햇빛의 색은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여름이 머무는 이곳의 잔디는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늘 그 자리에 있어주어 고마운 것들, 아낌없이 아름다움을 내어 주는 것들. 자연은 항상 이렇게 고마운 존재다. 언제나 한결같이, 말없이 아름다운 풍경들.
 새삼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에게 고마운 감정을 느끼며, 끼고 있던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바스스 부딪히는 소리, 아기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행복한 소리, 저 나무 사이 어딘가에서 연주하듯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벤치에 등을 기대었다. 그 어떤 음악보다 가장 편안하고 따뜻한 소리들이었다.



 조용히 주변의 것들을 하나씩 바라보다 보면 감사함을 느끼고, 곧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곤 한다.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무심하게 지나치진 않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그 끝에는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정작 나의 안부는 묻지 못할 때가 많다. 내게 주어진 것들과 함께 더 행복하고 싶다.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는 게 좋을지 생각하다 보면, 왠지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떠오른다.





관조는 조용한 삶의 특별한 선물이다.
삶이 조용할 때, 내가 쓰는 글이 무엇인지, 책은 왜 읽으며, 삶은 어디로 나아가는지 물어볼 수 있다.
조용한 시간 속에서 삶은 비로소 하나의 정물화―하나의 성찰적 그림이 된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조용하지도 않고, 이 삶 속의 나도 관조적이지 못하다.
고요나 관조는 이미 사라진 시대의 답답하고 고루하며 케케묵은 가치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인가?

<조용한 삶의 정물화>, 문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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