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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spiration Feb 10. 2019

낯섦과 마주하는 시간 - 런던 비행일기

런던, 테이트 모던

 누군가 나에게 왜 전시 보는 것을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마주하는 ‘매력적인 낯선 시간’을 그 이유로 꼽을 것이다. 이번 런던 비행 때 찾아 간 런던의 테이트 모던 역시 나에게 낯섦을 선사한 곳이었다.


 내가 느낀 첫 번째 낯섦은 전시장 전체에 퍼져있는 분위기였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펼쳐진 넓은 공간 곳곳에 누워있는 사람들이었다. 또 다른 한 켠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바닥에 모여 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그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시관 내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럿이 한 작품 앞에 한참을 서서 토론을 나누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명작 앞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자유로운 분위기는 우리나라의 조용한 전시문화에 익숙한 나에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전시를 그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와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술관 전체에 퍼져 있는 이러한 생동감 덕분에 다른 작품들도 더 빨리 보고 싶어 졌다.


 자, 이제 두 번째 매력적인 낯섦을 만나러 갈 시간. 테이트 모던에서는 기획 전시뿐만 아니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 전시도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좋았던 전시관의 주제는 ‘COLOUR’였다. 이 전 시관에서는 작품에 쓰이는 ‘색’의 개념을 확장시키고자 했던 20-21세기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색이라도 개인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인식한다고 한다. 이는 각자의 기분이나 출신, 심지어는 시력 등의 개인적인 요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을 보니 문득 ‘색’이라는 개념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마다 색에 대해 취향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같은 색도 전혀 다르게 느낄 수 있다니. 이 설명이 적힌 벽은 진한 노란색이었는데, 노란색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진하고 따뜻한 햇빛을 담은 듯한 색이었다. 지금 나와 같은 전시관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옆 사람에게는 이 노랑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해졌다. 혹은 노란색을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지?


Homage to the Square, Josef Albers


 전시관의 설명을 지나쳐 만난 첫 작품은 조셉 알버스(Josef Albers, 1888-1976)의 ‘Study for Homage to the Square(정사각형에 대한 경의)’였다. 이 그림 속의 색은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터널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색의 조합과 관계를 섬세히 연구하고 실험하며 백 가지의 버전을 만들어냈다.
 정말 신기하게도, 런던에 오기 며칠 전 보고 너무 좋다고 생각했던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 버전의 색 조합이 좋아 소장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이 여러 개의 사각형 중 한 가지 색이라도 없다면, 그 림 자체가 완전히 다른 느낌이 될 것이다. 조셉 알버스는 이러한 색의 상호작용에 주목했고, 색은 하나로서만 인식되는 게 아니라 주변 색들과의 상호작용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인지했다. 우리가 평상시에 인지하는 색도 그렇다. 어떤 물체의 색은 그 물체가 놓여있는 또 다른 물체의 색, 그 공간의 조명, 주위의 사물들과 함께 인지되는 색인 것이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 내가 있는 장소, 나와 함께하는 사물들과 함께 존재하는 삶, 서로 상호작용하고 때론 겹쳐 있는 삶. 조셉 알버스가 그토록 연구한 색채의 상호작용처럼, 우리도 나 자신을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 내 주변의 것들도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같은 색이라도 각자의 시선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처럼, 더 아름다운 색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시선을 만들어내는 것 또한 나의 몫이 아닐까.


Water lily, Monet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다음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꼭 보고 싶었던 모네의 <수련>이 크게 걸려있었다. 상설 전시관에 모네라니! 예상치 못하게 좋아하는 그림을 마주치니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멀리 떨어져서 보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색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작품의 제목인 <수련>보다 옆에 비치는 연못의 빛이 더 아름다웠다. 연못이나 강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물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옆의 것들. 그러니까 나무, 하늘, 햇빛의 색이 물결에 어른어른 비치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모네의 세계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색들이 가득하구나'하고 감탄했다.
<수련>을 보며 메모장에 조심스럽게 한 문장을 적어보았다. ‘평범하게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기록하자’


 모네가 보았던 이 연못이 누군가에겐 그저 지나쳐 가는 연못이었을 수도 있으리라. 같은 장소와 시간도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남는다. 그저 동네 연못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던 이 연못은 모네의 시선에 의해 세계의 명작, <수련>으로 아름답게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물에 비친 그날의 햇빛과 나뭇잎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캔버스에 아름다운 색을 입혔다. 나 또한 꼭 그림이 아니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과 사물들을 아름답게 바라보고 기록하기로 다짐해 본다.


 나는 원래 보고 싶고 내 눈에 들어오는 작품만 열심히 보는 타입이다. 게다가 모네의 명작을 본 직후라 다른 그림들이 쉽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남은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또 다음번에 오면 오늘처럼 무심코 지나쳤던 작품이 또 새롭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책이나 영화도 볼 때마다 새로운 부분이 눈에 띄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도 미술관을 들르게 되는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다음번에는 어떤 낯섦이 나를 반겨줄지 벌써 기대가 된다.



Mark Rothko
Mondrian
Anni Albers
Anni Albers





TATE MODERN (International modern and contemporary art)

OPENING TIMES:
Sunday to Thursday 10.00–18.00 / Friday to Saturday 10.00–22.00


 이 미술관은 탄생부터 범상치 않다. 테이트 갤러리가 산업혁명 시절의 화력 발전소를 개조해 완전히 새로운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벽돌로 만든 기념비적인 벽면과 세로로 긴 선을 만들어 내는 창문, 그리고 랜드마크인 굴뚝과 같은 예전 외형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나 내부는 완전히 개조되었다. 아트샵과 상설 전시, 기획 전시 그리고 템즈 강을 바라보는 전경의 카페까지.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런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왠지 모르게 런던스러운 느낌이 드는 장소이기도 하다.



"런던이 이 건축물의 구성에 벽돌의 검댕같이 스며들어 있다."
로완 무어, 건축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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