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홀로 걷다'를 보고
몇 년 전에 뉴욕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시장조사를 위해 당시 힙하다는 지역을 가보자 해서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라는 동네를 갔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숙소도 그 어딘가에 잡았는데 뉴욕의 다른 곳과는 정말 다른 분위기였다.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여서 그런지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개성이 강한 상점들이 모여있어 거리를 걷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한국에도 힙한 곳이 많이 있지만, 해외에서 거주하며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는, 미국의 인종적•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이 주는 묘한 분위기에 더 흥분했던 것 같다. 다양한 글씨, 다양한 식재료, 다양한 냄새,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색깔, 다양한 복장. 그곳에서 나는 하시디즘 공동체를 처음 봤다. 너무나도 독특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남자들. 꽤 보수적인 유대교의 한 종파 정도로 이해했다.
그다음 하시디즘 공동체를 어디서 접했냐하면 넷플릭스의 '그리고 베를린에서(Unorthodox)'라는 드라마였다. 어 그게 그거였어? 하며 뉴욕 출장의 기억이 떠올라 흥미롭게 생각하고 틀었으나, 그 내용은 내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 드라마는 하시디즘 공동체에서 도망친 여성인 에스티의 삶을 그린다. 외부 사회와 단절된 채 공동체 내에서만 유년시절을 보내며, 중매를 통해 20세 이전에 결혼을 한다. 이들은 홀로코스트를 통해 희생된 공동체의 재건을 위해 다산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어, 평균적으로 6-7명의 자녀를 낳고 기르며 일생을 보낸다.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고, 남편을 지원하고 자녀를 돌보는 것이 여성의 의무이기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삶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동시대에, 그것도 미국 뉴욕의 힙하다고 소문난 윌리엄스버그라는 동네의 일이라니 더 충격이었다.
드라마가 한 여성의 서사와 감정에 보다 집중한다면, 다큐멘터리 '홀로 걷다(One of Us)'는 더 넓고 입체적으로 하시디즘 공동체에 대해 보여준다. 여기서는 세 명의 인물이 나온다. 에티는 남편의 학대를 피해 공동체를 벗어나고자 한다. 하시디즘 공동체를 대상으로 재판을 진행하지만 결국 아이들의 양육권을 잃고 주 1회 1시간만 만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 아리는 어린 시절 종교 캠프의 지도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트라우마를 겪는다. 그는 이 충격으로 마약 중독에 빠졌고, 이 공동체를 벗어나려고 시도하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여전히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루저는 뉴욕을 떠나 LA로 이동 배우에 도전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직업을 구하고자 하지만 일반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현재는 우버 드라이버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의 하시디즘 공동체는 사트마르 계파인데, 사트마르 계파는 하시디즘 공동체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다. 헝가리를 중심으로 동유럽 지역 출신 유대인들이 구성원이며, 다른 계파와는 다르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간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반대하는 반시온주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며, 어린시절 부터 그들의 신앙과 전통에 대한 교육만을 받고, 세속적인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다. 언어 또한 독일어 계통의 이디시어를 사용하며 전통적인 의복을 입고 독특한 머리모양을 한다. 결혼한 여성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발을 쓰거나 모자로 가린다. 이들은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생애 전 과정에서 교육, 의료, 직업, 금융, 결혼, 양육, 법률 등 여러 방면에서 구성원들을 보호하고 지원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으로 인해 참혹한 박해를 받아온 이들의 비극적인 경험이 사트마르 계파의 결속과 보수성을 강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핍박 받고 희생 당한 선조들을 기리고, 자신들의 전통과 신앙을 지켜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미래 세대의 번성을 통해 이를 이어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최우선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공동체의 전통을 벗어나거나 결속을 흔드는 것을 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문제는 그러한 그들의 집단적 정체성이 개인의 자유나 인권보다 앞선다는 것이고, 심지어 강간이나 폭행을 당한 피해자들까지도 억압한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공동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뉴욕주 등 외부 사법 시스템에 도움을 구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며, 집단적 대응과 강력한 로비를 통해 피해자들을 무력화하기도 한다.
외부의 악한 적에게서 자신을 지켜내는 도구로써, 내부 집단의 관습과 규율 그리고 보수적 행위는 불가침한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 불가침한 정당성을 부여받은 내부 집단은 종종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다. 글을 쓰며 사트마르 계파의 하시디즘 공동체가 나치로부터 겪은 참혹한 피해와 아픔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를 정당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에스티가 음악원 입학 오디션에서 유대교 결혼식에서 부르는 Mi Bon Siach 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녀에게 결혼생활은 끔찍했음에도 말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역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며 Vehi She'amda 라는 노래를 부른다. 유대교의 절기 중 하나인 파사흐 때 부르는 것으로, 유대인이 겪은 박해와 이를 극복하고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내용이다. 공동체가 그들을 배척하고 아픔을 줬어도, 여전히 그들은 공동체를 추억하며 또 필요로 한다. 나였으면 어땠을까. 그들처럼 강한 결속력 있는 집단에 속해본적도, 그리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지도 않기에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들이 노래하는 것으로 그저 추측만해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