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해도 괜찮은 인간이고 싶다
우영우와 고함항아리와 <인간실격>
선릉역에서 역삼역으로 가는 테헤란로를 걷다 보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법률사무소로 사용된 빌딩을 지납니다. 우영우가 홱홱 돌아가는 회전문을 지나가지 못해서 쩔쩔맸던 그 빌딩이요. 요즘 그 빌딩 앞에서 모자를 꾹 눌러쓴 남자가 열과 성을 다해 노래합니다. 옆에 자전거가 놓인 걸 보니 가깝지 않은 곳에서 친히 이곳까지 와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고성방가로 잡혀가지 않습니다. 고함 항아리라고 들어보셨나요? 물 컵 크기의 작은 항아리인데 입구에 입을 붙이고 소리를 빽 질러도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도 작게 들리죠. 오늘 그 남자는 마이크 대신 고함 항아리를 입에 대고 브라운아이즈의 <벌써 일 년>을 열창했습니다. 주로 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발라드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 상상해 보려다가 금세 흥미가 떨어졌습니다. 사실 저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가끔 지나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재미난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관심을 보이곤 합니다. 출근길 테헤란로의 한국인들은 철저하게 그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눈앞에 떡하니 있지만, 항아리에서 새어 나오는 노랫소리가 들리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척, 들리지 않는 척합니다. 우리의 외면은 격리의 외면입니다. 그래도 그 남자는 아직 완벽하게 격리되지는 않았습니다. 좀 특이한 사람이지 광인 취급을 받진 않습니다. 예의 고함 항아리 덕분입니다. 고함 항아리 서비스만 있다면 세상의 질서는 위협받지 않습니다.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만 들려야 하는 테헤란로에 애절한 발라드 노랫가락이 가미되었지만 눈살을 찌푸릴 정도는 아닙니다. 전 이 항아리가 남자에게도 안정감을 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세상에 귀속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취향이니 자존감이니 외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바라봐주길 바라지만, 내가 속한 세상이 부여하는 나의 존재 의미가 미치도록 달콤해서 그 항아리를, 그 가면을 꼭 붙잡게 됩니다. 항아리가 남자의 괴성을 감당하지 못하고 깨지는 날, 그날은 남자가 처음으로 솔직함을 세상에 드러내는 날일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그를 철저하게 격리시킬 겁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천재성은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쓸모가 있기 때문에 빌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회전문을 통과하는 걸 도와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래하는 남자는 항아리 덕분에 빌딩 근처에 서있을 수 있지만 절대 들어갈 수 없고 항아리가 깨지는 날엔 역삼동에 얼씬도 못할 겁니다.
첫 번째 자살 기도에 실패한 요조가 생각납니다. 당시 요조는 세상의 질서를 해칠만한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가면을 쓴 광대는 팍팍한 세상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반면 쓰네코는 가면 따위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그녀의 존재는 지워야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쓰네코는 죽고 요조는 살았습니다. 그 후로 요조는 세상이 전보다 편해지기도 하고 뻔뻔스럽게 살아보자 생각도 해봅니다. 그러다가도 쓰고 있는 가면이 답답하여 더 이상 못살겠다 목매달아 칵 죽어버릴 생각도 했지만, 요조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궁금해 차마 죽지 않았습니다. 달콤한 가면을 조금씩 핥아먹다가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가 차오른 순간, 요조는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됩니다. 요조는 죄가 없습니다. 그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면 격리가 아니라 영겁의 시간을 구형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저에게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고함 항아리에 입을 대고 항아리가 깨질 때까지 노래할 충분한 시간. 작렬하게 실패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용기가 차오를 시간. 내가 겪은 실패를 너는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하는 조언 따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실패할 용기와 시간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