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를 할 때면 이 책의 209페이지가 떠오릅니다. 오프라 윈프리의 <What I Know For Sure(한국어 버전은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에 나오는 한 목사의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흑인이 투표권을 쟁취하고, 역사적인 첫 선거날. 아버지는 두 곳의 투표소에서 '잘못 찾아왔다'며 퇴짜를 맞았고 세 번째 투표소에선 투표 시간이 마감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8마일(약 29km)을 걸었지만 첫 투표의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음 선거만을 기다리며 살아갔지만 그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이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합니다.
I cast a ballot for everybody who came before me and gave their life's energy so that yours and mine could be a force that matters today. 나는 내 이전의 사람들을 위해, 오늘 너와 내가 던지는 한 표가 중요한 힘을 갖도록 온 생을 바친 이들을 위해, 투표한다.
선거는 경쟁이고 선거철엔 온갖 비난이 난무합니다. 상대 진영에서 꼬투리 하나 잡으면 부리나케 SNS 켜서 물어뜯는 모습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요. 지나가는 사람의 작은 투덜거림 조차 듣기 힘든 저는, 선거철에 더욱 정치와 멀어집니다. 정치인들이 싸우는 이유는 외면받기 위함인 것 같기도 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대중의 관심이 적을수록 편할 테니까요. "사람들이 나를 모르는데 돈이 많아"의 상태가 되는 것이죠.
네. 저도 변명인 거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죠. 특히 선거철엔 더더욱이요.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로 집으로 배송 온 여러 정당의 책자를 펼쳐놓고 하나하나 읽었습니다. 정당 이름도 다들 비슷해요. 한국사 공부할 때 가장 괴로운 1930년대 항일무장단체 이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한독립군, 한국독립군, 대한광복회 이런 것들이요. 이름은 비슷하지만 주력하는 정책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래도 각자 뭔가 주장하는 게 있긴 하구나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정치인의 존경을 받는 국민, 나. 나의 소중한 한 표를 하사할 인물과 정당을 정하고 사전투표소로 향했습니다.
오프라윈프리의 저 문장을 떠올립니다.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느낍니다. 선거철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는 '미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래가 들어간 정당 이름도 많더군요. 하지만 전 미래 만을 위해 투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장한 과거와 그 끝에 선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존경의 표시입니다. 한 표의 무게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