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3월 3일에 가족카톡방에 올려준 엄마 사진들을 2주가 지난 오늘에서야 하나하나 제대로 봤다. 부산에 있는 가족들이 매화 구경하러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30장을 한꺼번에 보내줘서 하나하나 확대해서 보지 않고 조그만 사진 속 어렴풋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을 봤다. 엄마 사진은 모두 아빠가 찍었다고 하더라. 좋은 구경했네, 아빠 사진 찍는 실력 많이 늘었네, 혼자 타지 사는 딸래미의 서울물 살짝 머금은 감상평을 보냈다.
사진이 올라온 날엔 차마 하나하나 볼 수가 없었다. 두려워서. 나이든 엄마의 모습을 보기가 두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대면하기 두려웠다. 물론 좀 더 어렸을 때도 지금도 울엄마는 예쁘다. 하지만 지금은 나 때문에 고생했던 지난 날이 선명하게 기록되어있다. 내가 부모 속썩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에 대한 미안함은 자식의 숙명인 것 같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사진을 봐야겠다 생각하게 된건 아직도 조금 어색한 엄마의 따뜻함 덕분이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들어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스트레스를 잠시 풀어볼 속셈으로 어젯밤 그러니까 금요일 밤에 아사이 캔생맥주를 하나 사서 회덮밥과 함께 먹었다. 술 좋아하는 아빠는 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맥주캔과 회덮밥 사진을 찍어 가족카톡방에 올렸다. 자주 접하기 힘든 소식, 큰 딸래미가 술 마신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동생과 아빠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아빠는 쥑이네~ 하며 좋아했다. 역시. 엄마는 아무말 없길래 아빠랑 같이 사진 보고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엄마의 답장이 왔다. "푸짐하네~~ 어제는 카톡 소리 못들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알림 소리를 못들었으면 그대로 끝, 다음날에 답장할 사람이 아니다. 제대로 잘못 알고 있었다. 엄마는 너그러운 존재였다. 나약한 불안 덩어리가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피난처였다. 고작 미안하는 이유로 애써 멀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화 구경가서 찍은 엄마 사진을 제대로 바라볼 용기가 났다.
핸드폰 화면 가득 채워 활짝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은 다사다난했다. 우리 모두 어리고 미숙했던 2000년 대가 스쳐갔고, 나 혼자 서울에 살게된 탓에 데면데면했던 2010년 대가 스쳐갔고, 엄마가 아팠던 2022년은 아직도 짙은 인상을 남기고 있고, 마지막으로 얼마 전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자신감 넘치는 엄마를 보았다. 어색했다. 모르는 사람같았다. 엄마의 지금은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살아가는 또하나의 인격체다. 자식은 이래야 돼, 부모는 이래야 돼, 엄마와 나를 연결하고 있던 이런저런 사회적 도리로 얽힌 길고 얇은 실이 팅 하고 끊어졌다. 이제 우리는 같이 늙어가는 사이다. 나답게 사는 삶을 응원한다. 상대가 불안해하면 옆에 있어준다. 드디어 우리 사이가 굵은 사랑의 실로 연결되었다.
부모는 자식 때문에 고생해서 나이든 게 아니다. 인간이 시간 속에 사는 한 나이듦은 당연한 거다. 그래서 슬퍼할 일도 아니다. 자식된 도리로 부모의 나이듦이 슬프고 미안함이 든다면, 이건 부모 말도 들어봐야한다. 정작 본인은 슬프지 않을 수 있거든. 지금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친다. 나에게 남은 자식된 도리는 부모의 어떠한 모습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엄마는 임영웅이 부르는 노사연의 바램을 좋아한다. 바램의 마지막 가사처럼 앞으로 우리가 함께 걸어야할 길이 사막일지라도 서로 의지하고 녹진하게 익어가는 사이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