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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메이징 그레이스 Apr 12. 2023

살면서 가장 구역질이 났던 일은?

고전 질문 독서 [앵무새 죽이기]

"그런데 말이야, 딜, 결국 그는 흑인이잖아."
"난 그런 거 손톱만큼도 상관 안 해.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 그게 나를 구역질 나게 만드는 거야."
(...)
"너희들은 낯가죽이 두껍지 않아. 그래서 구역질이 나는 거지?"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 만 나이를 더 먹어 봐, 그렇게 될 테니."


살면서 이 세상에, 혹은 내 주위나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 중에 구역질 났던 적이 언제였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대학교 졸업반 때 일이다. 나는 1년간 휴학을 했던 터라 한학번 아래의 후배들이랑 같이 졸업했다. 졸업 논문을 쓸 때였다. 팀을 짜서 논문을 쓰고 발표 준비를 하는데 그때 과에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구네 조에서 논문을 거의 Y가 혼자 다 하고 있다고, Y를 조종하고 있는 K를 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 또한 Y가 원치 않는 일일 수 있어 자세한 내막을 지금 글로 풀어내기는 어렵지만)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Y와 K가 트러블이 생겼고 그때 당시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는 Y에게 K가 그 사실을 빌미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서로의 부모님과 연락을 하고 지낼 만큼 둘은 원래 사이가 좋았었다. K의 태도에 구역질이 났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는 Y도 답답했기에, 결국 내가 나서서 K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렇다.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나는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K는 "언니 그게 아니라..."로 말을 시작하더니 3분도 안 돼서 언니는 온데간데없고 호칭도 야, 너로 바뀌고 욕을 했다. 외모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던 K는 나에게 외모 공격도 했다.

"남의 일에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네 얼굴 관리나 해."

 나는 이 애랑 싸우려고 한 게 아닌데 어찌 손써볼 도리도 없이 완패하고 말았다. (나는 이날 이모를 찾아가서 엉엉 울었다.) 이 일은 금세 소문이 퍼져서 K에게 리포트를 써다 바쳤던 남자 선배들마저 분노하게 만들었다. Y와 K의 일은 묻히고 나와 K의 일이 더 큰 화제가 되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배들이 나를 불쌍하게 쳐다봤다.

K는 우리 과 퀸카였다. K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데이트를 구걸하던 남자 선배들은 태도가 돌변하여 K의 외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도마 위에 올렸다. 마치 그들은 그동안 K에게 거절당하거나 이용당했던 한풀이를 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나를 위로했다. 그때 내가 들었던 제일 어이없던 말이 "K보다 네가 더 예뻐."라는 말이었다. 이걸 무슨 의도로 한 말일까? 나에게 위로를 한 거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처음 K의 태도에 구역질이 났던 나는 점점 이 사람들에게 구역질이 났다. 졸업 직전까지 우리 과 카페 게시판은 익명의 글로 K를 욕하는 글들이 난무했다. K에게 면전에 대고 한마디 했던 나를 무기 삼아 그들은 뒤에서 저러고 있다니, 졸업 직전까지 구역질이 났다. 그 무렵 동기 남자친구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둥글게 둥글게 살아."

난 아직도 둥글게 산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잘 모르겠다. 부당한 일 뒤에 숨어 비겁하게 살라는 말의 포장지처럼 여겨진다. 아무래도 저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안타까워해야 할 일인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이를 더 먹어가면서 나서는 일이 없어졌다.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 년 만 나이를 더 먹어 봐, 그렇게 될 테니."

라는 문장이 20대에서 40대가 된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 심장이 따끔거린다.



또 구역질이 나고 눈물이 났던 일은, 세월호 사건이다. 처음엔 그 아이들이 그렇게 되도록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맨 윗사람부터 관련된 사람들 모두에게 구역질이 났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세월호 사건을 이용해 자신들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에게 또 구역질이 났다.


글의 말미에 질문 하나가 더 떠오른다. 나는 누군가에게 구역질 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을까?

누군가의 약점을 볼모로 이득을 취하거나 제멋대로 행동했던 적은 없는지 조심스럽게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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