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글을 쓴 날은 아마도 다섯 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좁은 빌라 마룻바닥에 엎더져 "엄마", "아빠", "자동차" 따위의 단어를 써냈던 날이었을 것이다. 삐뚤빼뚤한 글씨 탓에 간신히 서로 기대어 있는 자음 모음들도 여러분들이 기꺼이 예쁜 글이라 해주신다면 말이다. 그러면 나의 글쓰기 이력은 적어도 10년을 더 벌게 되는 셈이다. 10년을 더 벌어선 뭐 할래? 그래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글이라고 하면 이제, 사유하기 좋은 수단이죠; 내 감정의 유일한 배출구예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충분한 예술이에요; 같은 말들을 아무런 의식 없이 쉽게 할 수 있다. 사진과 영상이 이미 익숙한 시대에, 인공지능이 대신 글을 써주는 시대에. 이제 와서 글이 그런 거라고 말한들 글의 입지는 조금씩 퇴색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글들은 바닥에 흩뿌려진 압정처럼 우리의 발밑을 소리도 없이 엄습하고, 또 어떤 글들은 잘 깎인 조각상 뒤로 늘어진 그늘 아래 잠든 노숙자처럼 조용하고, 또 어떤 글들은 노숙자의 행낭을 뺏어 집을 짓곤 그 속에서 돈을 굴린다. 기준은 각자의 기준이 된 지 오래. 그렇다면 나의 글쓰기 이력도 10년을 당기든 5년을 당기든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이름하여 누구나 쓸 수 있는 시대에 와서 아직도 글쓰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밥 벌어 먹고살고자 하는 게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순간에, 그러나 정말로 글을 잘 쓰면 좀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보는 어둑한 한낮에, 다시 여기로 돌아왔다.
이제 내 몸에 완벽하게 체화된 반지하라는 양식은 조명을 두세 개씩 환하게 켜고 문을 활짝 열어두어도 음침한 그늘을 조성한다. 이 음침한 그늘에 내가 개발한 실린더 끝에 뾰족한 촉수-정신이란 것을 장착해 투척하면 가난의 정수를 길어 올릴 수 있다. 가난의 정수란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가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다. 가난의 정수란 결핍에 대한 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곧 결핍-생각이란 메커니즘은 돈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나의 가난을 이야기하는 테제가 된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사랑이 없었다. 나는 유년이 없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피시방으로 몰려다닐 때, 나는 공장 한켠에 딸린 작은 컨테이너박스로 된 사무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사무실 책상 밑서랍에 쌓여 있는 중국집 전단지가 나의 스케치북이었다. 굴러다니는 모나미펜이 나의 사인펜이었다. 운이 좋으면 빨간색과 파란색을 칠할 수 있었다. 검은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생물은 개미밖에 없었다. 나는 그것을 전단지 뒷면에 가득 그려 넣었다. 개미 한 마리, 개미 두 마리, 개미 세 마리... 점점 모여서 그것들은 부대가 되고 연대가 되고 군단이 되었다. 반대편에 똑같은 작업을 하면 전쟁이 되었다. 가장 선봉에 선 개미는 투구를 함께 그려주었다. 그렇게 속으로 외친다. 쳐라! 쳐라! 쳐라!
미동도 없던 개미들이 움직인다. 아니 움직이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할 말들이 더 많아진다. 대포 소리, 함성 소리, 신음 소리, 항복을 선언하는 소리. 전쟁이 끝나면 다음 전단지를 꺼냈다. 그곳엔 운 좋게 구한 빨간펜과 파란펜으로 구획지어 놓은 여러 영역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은 영역에 변화가 있는 날이다. 빨간 영역이 승리한 날이므로 세가 확장한다. 파란 영역은 세가 줄어 두려움에 떨지만 복수를 다짐한다.
엄마가 밥을 먹자 한다. 아버지는 짬뽕을 드시고 나는 짜장면을 먹고 엄마는 내가 남긴 것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아버지는 짬뽕을 다 드시고 뉴스를 보거나 신문을 읽으셨다. 정확히 30분이 지나면 일어나 다시 공장으로 향하시고 엄마는 그릇을 포개어 사무실 문 앞에 둔다. 그리고 두 시간이 흐른다. 배가 불러 잠든 이 아이는 꿈을 꾼다. 개미다. 동그랗고 검은 개미들이 더듬이를 휘날리며 싸우고 있다. 개미들이 싸우는 이곳은 컴퓨터실이다. 누나들과 함께 동네 면사무소 3층에 갔을 때 구경한 그 멀티미디어실이다. 개미들이 모니터와 본체에 기어올라 대포를 쏜다. 대포알이 책상 모서리에 떨어지자 사과를 베어 문 것 같이 옴폭하게 파인다. 그 구렁 속에 개미 사체가 떼글거린다. 이 방식은 마치 누나들과 함께 했던 게임 ‘웜즈’와 매우 비슷하다. 아이는 갑자기 각성한다. 자기 자신의 머리에 씌인 투구를 발견한 것이다. 아이는 큰 소리로 외친다. 쳐라! 쳐라! 쳐라.
잠에서 깨자 차 안이다. 이제 집으로 가는 것이다. 집으로 가서 씻고 저녁을 먹고 빈둥거리다가 다시 잠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생각한다. 그 꿈을 또 꿀 수 있을까?
촉수는 한 번씩 충전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의 정수를 뽑아낼 수 없다. 무엇이 없다는 느낌을 느낄 수 없게 된다. 촉수를 충전하는 방법은 잘 사는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늘에 잠식될 뿐이다. 가난의 정수가 아니라 가난의 화신이 찾아와 목을 옭아맬 것이다.
얼마간 내게 글자는 개미였을지도 모른다. 개미를 줄지어 그리는 것이나 글자를 또박또박 쓰는 일이나 똑같이 재밌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보기에 똑같이 의미 없었으니까. 어떤 날엔 잔뜩 화가 난다. 왜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 걸까? 보시라. 글이란 인간이 자신의 사유를 펼쳐낼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영원에 부칠 수 있는 방법... 아니, 됐다.
요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는 건 좋은 일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기만 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나를 포함해서 우리가 읽기라는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 서로 손은 잡고 있어도, 서로 포옹은 하고 있어도, 서로 술은 마시고 있어도 각자 할 말만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뉴미디어 시대에 글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건 좀 신기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텍스트가 무분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 텍스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무분별하다고 판단하는 태도가 문제라면 문제일 것.
개미떼가 지나간다. 무질서하다. 여기서 나왔다가 저기로 들어가고 저기서 나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두 마리씩 가기도 하고 한 마리가 가는데 그 뒤로 한참 없다가 또 수십 마리가 몰려가기도 한다. 한 마리는 오른쪽 구멍으로 들어가고 세 마리는 왼쪽 구멍으로 들어가고 절대다수의 개미들이 중앙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저 구멍들로 들어가면 여왕개미가 있을 것이고 모든 구멍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애초에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체계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글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마다 가지는 글의 체계가 다르다. 그러나 글이라는 본질을 생각해본다면, 산으로 가도 사랑하는 풍경이 있고 바다로 가도 사랑하는 풍경이 있는 여행의 본질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글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자의 글이 갖는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관계적 태도가 수반되지 않으면 혼잣말은 곧 침묵이 될 것이다.
그래, 다섯 살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치자. 내가 25년 동안 글을 쓰면서-더 정확히 말하자면 글이라는 형식에 기대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은 무료함이다. 무료하게 글만 쓰고 있다.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이지만 조금 다르게 하는 것이고, 조금 다르게 한 말에서 뱀 허물보다 얇은 의미를 줍는다. 그리고 그 의미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또 포를 뜬다. 포의 포를 뜨는 것이다. 그러면 살 껍질도 비닐도 아닌 의미 위의 의미가 생성된다. 이걸 가지고 하루를 산다. 생각 위에 생각 얹기. 층 위에 층 쌓기. 무너져도 Ctrl+z 하면 된다. 그러면 절망이나 비극이 없으니까. 아주 고요하고 무료하지.
나는 지금 고백적이다. 당신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다. 글쓰는 사람의 대표적인 증세라 생각해주길. 그러나 마음먹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낫지 않는 병세라는 것도 기억해주길. 그렇다면 이 고백은 읽혀야 하는 겁니까? 그렇진 않다. 나도 독실한 신자는 못되지만 세례명이 있고, 교회보다 절을 더 많이 가기야 했지만 제일 믿는 건 글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읽어주지 않아도 내 글은 살아서 잘 걸어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무료하게 글을 쓰더라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사람들이 내게 물었다. 왜 글을 쓰게 되었나요? 이제 이 질문은 이렇게 고쳐 들린다. “왜 그렇게 필사적이게 되었나요?”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그 증거는 내가 나를 필사적으로 버렸을 때 획득한 게 분명하다.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시고 잠에 들었다. 길에서 깬 적도 있고 술집에서 깬 적도 있고 피시방에서 깬 적도 있었다. 술을 마시고 모르는 사람들과 함부로 이야기를 나눴다. 잠에서 깨보면 모르는 이름들이 마구마구 저장되어 있었다. 그 대부분은 흐릿한 기억으로 예술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이었는데, 눈빛만 봐도 네 놈 자식이 오늘 술값이 없어서 날 꼬시려는구나 하는 게 보였고 나는 속은 척 해장국을 사주었다. 저마다 아빠가 죽거나 엄마가 집을 나간 상황이었는데 해결책은 마땅찮아 보였다. 그리고 한 청년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문학을 하고 싶은데요. 그래서 나는 나도요, 하고 대답만 했을 뿐인데 말장난하는 거냐며 나를 그렇게 때리는 것이 아닌가. 온몸에 상처가 나서 골목길을 오르는데 웃음이 났다. 내가 뭐라고 이러고 있는 것인가? 또 하루는 혼자서 강릉을 갔다. 죽으러 갔지만 최승자가 말렸다. 최승자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 같은 건 죽어서도 쓸모가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최소한 쓸모라도 만들어 놓고 죽자는 다짐을 하곤 그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만 보다가 왔다. 가끔은 그때가 후회되기도 한다. 소주를 마시다 보면 죽음은 불현듯 와 있다. 하지만 깨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죽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검고 뚱뚱하다. 어슬렁거리길 좋아하지만 말이 많은 편은 또 아니다. 표정은 없는데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는 신기한 놈이다. 그러나 내가 짐작이라도 하면 슬쩍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같이 갈까?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양면을. 그래서 나는 필사적이란 말을 아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살아왔던 날들과 필사적으로 죽어갔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니 그 사이에 굽힌 무릎처럼 무디게 솟아있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밤샐 각오를 하라. 그리고 나를 쳐라. 나는 그런 사람이다.
김해경의 새 연재 <라이팅룸>은 10년 넘게 글을 쓰며 살아온 그의 방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햇볕 잘드는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골방에 파묻혀 기록했던 조금은 괴랄한 이야기. 메일리와 함께 게재된다.
김해경 : 물성과 해체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산문집 『뼈가 자라는 여름』(결, 2023)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