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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내댁 Aug 11. 2019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단상 2

2016년 29살의 어느 날, 결국 나는 공연 아카데미에 재입학하게 되었다.


물론 회사 생활과 병행하기로 했고, 출근-퇴근-등교-하교라는 기나긴 퀘스트를 끝내야 만이 하루가 끝나는 어마 무시한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 참 엊그제 같은데, 벌써 3년이란 시간이 흘러 버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친구와 수강 등록을 하러 가던 날, 첫 수업 날, 1박 2일로 오리엔테이션을 갔던 날, 다양한 수업과 과제, 활동, 마지막 수업과 졸업 공연까지 어느 하나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원래대로 라면 2017년 1월 대리급으로 승진했어야 했지만 결국 승진은 1년 밀리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제는 더 이상 커리어를 바꿀 일이 없고 쭉 공연계에서 바닥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정말이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강의는 이론 위주였지만 강사님들은 현직에서 일하고 계시는 선배님들 혹은 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발을 담그신 감독님, 연출가분들이었다. 공연 업계 특성상 매우 낮은 연봉과 말도 안 되는 처우가 여전했지만 업계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초년생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꾸준히 한 길만 파신 분들은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20대의 끝자락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고용하는 분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일반 회사에서 일하시다가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뒤늦게 입성하신 분들도 많았고, 단순히 공연장에서 일하는 직군 말고도 파생된 직업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배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도 배웠다.


이따금씩 과제를 주시는 강사님들에게 눈에 띄기 위해 밤을 새워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 외에 수업이 끝나고 진행되는 저녁식사 자리는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핑계로, 술을 잘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거의 빠지기 일쑤였다. 내가 제출한 과제에 대한 피드백과 그 질문에 곧잘 대답하는 나를 강사님들은 좋게 보셨고 아직 사회생활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동기 동생들에게도 그게 멋있게 보였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뭄에 콩 나듯 있는 원장님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원장님은 내가 대학교 때 초창기 아카데미를 다닐 때에도 계셨었고 매우 유명한 가수들의 콘서트 연출을 아직도 하고 계시는 업계의 거장이신 분이었다. 원장님 수업의 과제 중에 하나가 현재 공연계가 더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 해오라는 것이었다. 거창한 것도 좋고 공연 중간에 스태프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단순한 물건이어도 좋다고 했다.


여태까지 마주한 과제 중에서는 매우 고난도였고, 이번이 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출근하는 날 아침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름 IT 업계에서 일하는 나이기에 그런 특장점을 살려서 공연계에 접목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고 있던 찰나였다.


결국 일주일에 걸쳐 프레젠테이션 20장을 엮어서 내용을 만들었고 원장님 앞에서 수월하게 발표도 마쳤다. 다음 날 원장님께서는 나를 따로 불러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주셨고 내가 낸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면 공연 준비할 때 매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어플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어플을 출시한다고 해도 베타 버전 테스트나 개발자를 따로 구해야 하는 등 결국엔 나 혼자서만 진행하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IT 전공에 IT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남편은 가끔씩 이 어플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내가 감당하기에는 판이 커질 것 같아 아직도 나만의 작은 소망으로 남겨두고 있는 아이템이다. 원장님의 수업을 끝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이직에 대해 알아보고 많은 선배님들과의 만남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은 월급이었다. 월급이 지금의 반으로 줄어도 괜찮냐는 마지막 물음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상 지금 회사도 매년 연봉 동결이라 다른 회사에 비하면 매년 연봉이 줄고 있는 셈인데 이 월급에 반을 받는다니, 당장 서른을 앞둔 나는 너무나 두려웠다.


그렇게 강의는 모두 종료되었고, 조금씩 일자리는 찾아가는 동기들이 생기고 나는 여전히 회사에 남아버렸다. 승진이 밀렸지만 그래도 그동안 조금 소홀히 일한 것에 비해서는 달콤한 월급에 결국은 백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참 바보 같은 나였지. 그래도 이렇게라도 아주 미약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좋은 친구와 동기들을 만났지만 결국 두 번 다 실패였던 공연계 입성기였다.


3년이 지난 지금은 결혼 전의 짧고 강렬했던 추억 중에 하나지만, 그 이후로 나의 자신감은 더 떨어졌고 이제는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많이 방황했고, 취미는 취미로 즐기자는 상처가 남게 되었다. 그래도 훗날 후회하지 않도록 이 정도 투자와 노력을 했으면 됐다는 위로를 조용히 나 스스로에게 했고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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