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학력고사

by 김재완

이 땅에 마지막 학력고사가 시행된 1992년에 나는 하필 고3이었다.

내년부터는 수능이라 불리는 새로운 시험제도가 도입되기때문에 재수는 꿈도 꾸지 말라는 선생님들과 언론의 엄포가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이 짓을 또다시 어떻게 1년이나 한단 말인가?’


보수적인 성향의 고향에서도 고3은 벼슬이었다. 밥을 먹다가도 짜증이 솟구쳐 오르면 숟가락을 던져버리고방을 나갔고, 아버지는 그저 “저……저……” 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분을 삼키셨다. 그런 나를 위해 엄마는 주먹밥을 만들어 내 방으로 밀어 넣고 말했다..

“1년만 참아라. 고생하는 거 다 안다.”

어쩌면 그 말은 엄마가 스스로 하는 위로였을 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염원인 명문대학 진학이라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것은 부모님을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고향만 벗어날 수 있다면 대학은 상관이 없다고생각했다. 예년 같으면 자신의 성적보다 상위권의 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도 있었으나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우리는 안정적인 입시전략을 추구했다.

학력고사는 오직 하나의 대학교에 지원 할 수 있었기에(후기라는 제도가 있기 했지만) 더욱 긴장감이 고조되는 스릴만점의(?) 시험제도였다.


내 평생 딱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버틴 1년이 지나고 드디어 학력고사 전날의 아침이 밝았다. 엄마는 새벽 6시에 잔칫상을 차렸다. 마치 과거를 보려 한양으로 떠나는 아들을보내는 마음이었으리라. 어린 마음에도 이 밥은 다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엄마의 정성을 삼켰다.


고향의 기차역은 떠나는 자식들을 배웅하는 가족들로 오랜만에붐볐다. 나는 기차에 올라 이어폰을 끼고 워크맨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며 작은 역을 채우는 시골의 유난스러움을차단했다. 몇 시간 후 도시의 큰 역에 도착하자 시골의 유난스러움은 정겨움이란 걸 깨달았다. 사람들로 붐비는데 역 광장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낯선 도시의 버스 노선도를 확인하고, 내가 지원한 대학교에 도착했다. 학력고사를 치를 강의실을 확인하고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나는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12년동안 결석, 지각, 조퇴 한 번 하지 않고 이어온 지난한날들이 내일로 종식이다.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합격해야 한다. 재수는생각하기도 싫다.


그런데 오늘 밤 갑자기 맹장이 터진다면? 혹시나 늦잠을 자서 시험장에 못 들어간다면? 아니면 답을 한 칸씩미루어 쓴다면? 내가 서울대에 합격할 확률보다 낮은 확률의 불운을 앞당겨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감기가 들까 서둘러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나는 엄마가 얼마 전 낯선 도시에서 발 품을 팔아 얻은학교 앞 한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호텔 숙박비 이상의 돈이 지불 되었다. 도시락을 포함한 세 끼 식사가 포함된 1박 2일 -학력고사 기간에만 생겨나는- 패키지상품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5살 딸 아이를 가진 신혼부부는 18평 아파트의 작은 방과 인심을 내어 주었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것이 분명한 그녀는 솜씨를 발휘해정갈한 저녁 밥상을 차려주었다. 새벽에 먹은 엄마의 잔칫상 음식이 소화가 안 되었지만 나는 어색함을치우기 위해서라도 수저를 들었다. 우리는 서로가 낯설었고 TV는집안을 지배하는 차가운 공기기를 데울 수 있는 인공태양 같은 존재였다. 나는 거실에서 밥을 먹다 마이클조던의 모습을 부산하던 숟가락질을 멈추었다. 고향 집에서는 볼 수 없던 말로만 듣던 AFKN이었다. 농구광인 내가 꼭 합격해서 도시에 살아야 할 이유가하나 늘었다.


19살 소년이 낯선 도시에서 혼자 밥을 먹고 샤워를 마치고 학력고사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시험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최고의 컨디션을유지하기 위해 일찍 잠들어 숙면을 취해야 한다. 새벽에 잠이 깨지 않기 위해 화장실을 한 번 더 다녀오면서도중압감을 이기고 잠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수면제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우려가무색하게 나는 금세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주머니가 싸준 보온도시락을 들고 시험장으로들어서니, 전국에서 모인 비슷한 성적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재수를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배수의 진을 쳤지만, 셍긱보다 떨리지 않았고,별 탈 없이 시험을 마쳤다. 평소 촐랑대는 성격과 달리 큰일 앞에서는 오히려 의연해진다는걸 이때 알게 되었다.

온 종일 앉아만 있었는데도 몸에 극심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서둘러 전날 머물던 집에 도시락을 돌려주러 갔다. 아주머니는 꼭합격해서 하숙도 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며 불편한 건 없었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도시 기차역의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를주문하고 광장을 바라보았다. 처음 먹어보는 패스푸드 햄버거를 씹으며 고단했던 고3 시절을 곱씹어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온 케첩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내가 이 도시로 다시 올 수 있을까? 오게 되면? 과연 부모님 곁을 떠나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대학생이 되면 나도연애란 걸 할 수 있을까? 군대도 코 앞 이내?’


합격자 발표 날의 집안 공기는 소름 끼칠 정도로 무거웠다. 기대에 찬 엄마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눌렀다. 내 수험번호를 확인한 수화기 반대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전 깊은 곳에서 괴기스러운 환호성이 뿜어져 나왔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두려움, 동경, 기대, 떠나야하는 아쉬움 등의 감정을 초월하는. 단 하나의 그것은 사실 해방감이었다.

‘이제 공부 안 해도 된다!!!”


나와 12명의농구멤버는 합격할 경우 초등학교의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학교로내달렸다. 겨울인데도 바람에 온기가 느껴지며, 세상의 모든풍경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학교 나무 밑에는 떡볶이 코트를 입은 철수만이 혼자 히죽거리고있었다. 1시간이 지나서야 남들은 다 쉽다고 한 시험을 혼자 망쳤다고 두문불출하던 찬동이가 콧물을 휘날리며달려왔다.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유년 시절이 끝나고, 각자의짧은 청춘이 시작되었다.


대학교 입학을 며칠 앞두고, 학력고사 전날 묵었던 집을 다시 찾았다. 엄마는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고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고, 아주머니는 하숙집으로 다시 찾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더 자주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오래 쳐다보시더니어렵게 발길을 돌리셨다. 집에는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훗날 엄마는 나를 군대 보낼 때 보다 그날이 더 슬펐다고 한다. 있는집 아이들처럼 더 큰 집에 독방을 쓸 수 있는 하숙집을 못 구해준 것이 미안했다고 말씀하시면서.


학력고사 전날 밤과 같은 방에 누웠는데 이번에는 새벽까지잠이 오질 않았다. 어제까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다니며 방문이 부서져라 닫던 사춘기 학생이었는데, 내일부터 내가 대학생이라 술을 마실 수 있다고 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돌아보니 그 밤은 안전한 둥지를 떠나 인생의 모험이 시작된첫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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