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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즘 Aug 03. 2018

연민에 대한 수기

막상 연민이라는 단어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에게는 이 단어가 참 낯설다. 보통 '연민을 느낀다'고 표현하므로, 이성의 세계보다는 감정의 세계에 속하는 단어로 이해된다. 거리의 서점마다 '이해'와 '공감'을 주제로 출판된 책들이 베스트셀러칸을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 나는 어쩌면 감정적인 트렌드에 많이 뒤쳐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았다.

연민(憐憫):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


연민한다는 것은, 연민의 대상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마침 알게 되었고, 그 상황을 나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보니 그의 처지가 참 딱하여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느끼게 되었다'라는 뜻으로 보인다. 막상 연민을 느끼기 위해서는 꽤나 긴 인식과 감정의 프로세스가 막힘 없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의 상황을 인지하여 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음과 동시에, 마음에서는 자연스레 가여움의 감정이 피어 올라야 한다. 왠지 연민이라는 단어가 더 낯설게 느껴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입장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은, 곧 그를 '이해한다'라는 개념으로 발전되게 마련이고, 그 뒤에야 '연민'을 느낀다든가, '공감'할 수 있다든가 하는 다음 단계의 감정교류가 가능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일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싶다. 아마도 다른 이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고, 타인에 대한 호기심을 귀찮음으로 꾹꾹 누르는 습관이 언제부턴가 나에게 배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을 알아갈 때의 그 달콤한 재미와, 나를 관찰하는 데 마음의 에너지를 더 쏟고 싶어하는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연민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종종 괴로워했다. 아마도 연민이라는 감정에 앞서, 이해하는 작업조차 버거워했던 것 같다. 반대로 누군가 나를 이해한다고 설교라도 하려들면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내가 느끼기에 상대는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다 이해한다고 말하며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를 몰아갈 때면 그 것만큼 참기 힘겨운 일이 없었다. 나이가 더 많은 누군가가 인생의 선배라도 되는 양 충고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너무도 시답지 않게 느껴졌다. 시중에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은 모두 자각을 게을리하는 대중을 상대로 벌이는 상술로 느껴졌다.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는 주위 친구들과의 대화는 답답하기 일쑤였다. 정작 감정적으로는 누구에게라도 위로받고 싶어하면서 배타적인 태도를 고집했던 나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연민의 대상이었을까.


곰곰이 돌이켜보면 나도 연민을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연민은 항상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받기 어려운, 그래서 배격되곤 하는 어떤 모호한 대상이었던 것 같다. 몇 해 전, 어느 영화감독이 여배우와 바람이 났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은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행실을 꾸짖으며 그의 작품까지 싸잡아 쓰레기 취급을 했다. 나는 단숨에 그 영화감독에게 한없이 커다란 연민을 느꼈고, 세간의 비난이 지나치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잘못은 그의 잘못으로 남는 것이고, 비난의 몫은 그 스스로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했다. 한 영화감독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직접적으로는 아무 관련 없는 다른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피해를 준단 말인가. 그저 그 감독의 가족들과 친분이 있다면 그들에게 연민과 응원을 보내고, 잘못을 저지른 이가 후에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것을 목격할 권리 정도는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내 생각을 몇 번 주위 사람들에게 꺼내어보려다 그들의 반응에 겁을 집어먹고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한 때 여러 작가들의 고전소설에 흠뻑 빠져 독서를 멈추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중 내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잔인한 살인자든, 흰소리만 늘어놓는 정신병자든-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민과 끝없는 애정을 느꼈다. 온갖 광기와 살인으로 뒤덮인 비극이 극에 달해 결국 웃음이 터져버리고 마는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고통 받는 배우들의 발에 낀 때라도 따뜻한 물로 씻겨주고 싶었다. 지금도 그 극단의 배우들은 내 책장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만 같다. 비현실적인 대상을 향한 연민도 연민에 속할 수 있다면, 아마도 내 연민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해를 뿌리 삼아 자연스럽게 발아한 감정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 연민도 누구와 공감해본 적은 없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연민의 방법에 익숙지 않더라도,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민을 한다. 연민의 모습은 획일적일 수 없다. 누군가는 상대의 눈높이로 내려가 그의 상황을 다 듣고 나니 참 딱하다는 생각에 혀를 차며 뒤돌아서는 연민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너무도 깊이 공감한 나머지 연민의 대상이 되는 이가 느끼는 것을 넘어서는 괴로움에 한껏 흐느낄 수도 있다. 타인을 향한 연민이 달갑지 않아 오로지 자기연민에만 푹 빠져 지내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길 타인에 대해 감정을 품는 것은, 가슴 속 에너지가 그 사람에게 직접 이동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내 가슴 한 켠으로 끌어와 담은 뒤 내 마음에 위치한 그의 이미지에 리비도(libido)를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자기애가 강한 사람일 수록 자기 가슴 속 공간을 자신의 이미지만으로 가득 채우려 할 것이다. 연민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보호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을 가진다고 해도 틀린 연민은 아닐 것이다.


연민이라는 감정만을 오롯이 마주하며, 여전히 나는 이 단어가 낯설다고 생각한다. 연민의 감정을 적게, 혹은 매우 적게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부속품을 빠뜨린 채로 태어난 불완전한 존재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꼭 타인을 향한 온기를 품은 연민만이 옳은 연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살면서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동시에 특출나게 발달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당신이 연민할 능력이, 또는 그 기회가 적다고 하여 스스로 감정이 텅 비어버린 존재라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연민이라는 단어를 관찰하는 데 그치고 만 이 하찮은 수기도, 연민을 쉬이 느낄 줄 모르는 누군가를 공감하는 서투른 연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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