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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03. 2024

은수의 이야기 (4)

새로 옮긴 학교는 첫 발령받았던 학교와 사뭇 달랐다. 첫 학교는 공장 지대에 있어 수업 중 창문을 열면 철가루가 섞인 먼지가 들어오곤 했다. 순수하고 착했지만 거칠고 학력이 낮은 아이들은 담임으로서도, 교과 선생님으로서도 어쩐지 힘든 면이 많았다. 정든 학교를 떠나 오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바뀐 환경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은수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신도시에 위치한 신설학교. 모든 것이 새로운 학교였다. 위치도, 건물도, 그리고 선생님과 아이들도. 한 학년에 11개의 학급이 편성되어 있었다. 전교생이 1,000명이 넘는 학교. 중학교 치고 선생님들이 많아 업무가 자연스럽게 잘게 쪼개어 배분 됐다. 이전 학교에선 한 사람이 하던 대여섯 개의 업무가 이곳에서는 7명이 나눠하는 일이었다.


집에서 관리를 해주는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속을 썩이는 법이 없었다. 필기구가 항상 갖춰져 있었고, 수업 태도 역시 바르게 잡혀 있었다. 가끔 남학생들은 거친 욕설과 심한 장난, 여학생들은 짙은 화장과 치맛단 길이로 실랑이를 벌이긴 했으나 이전 학교처럼 수업 중에 욕을 하며 나가버리거나, 선생님한테 일방적으로 욕을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연히 학부모님들도 예의를 갖춰 은수를 대했다. 퇴근 이후엔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전화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안녕하세요. 선생님. OOO 엄마인데요."라며 본인을 밝혀왔다. 그런 '정돈됨'이 은수는 좋았다. 소위 말하는 상식과 예의가 통하는 곳. 그래서 아이들도 참 예쁘고, 학부모님들도 든든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 사실은 은수에게 큰 힘을 주었다. 




맑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3월의 교실은 평화로웠다. 아이들이 평소보다 일찍 떠난 교실은 낮 동안의 소란스러움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간간히 떠다니는 먼지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시계초침소리만이 가득한 곳. 어쩐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곳에서 은수는 약간 들떠있었다. 


학부모 총회. 새 학기가 되어 학부모님들을 만나 인사를 하며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중학교 2학년이니 고입보다는 학교 생활지도를 더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리. 지난 경험을 살려 자료를 준비했다. 대충 이런 내용을 나누면 되겠지,라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떨리긴 했지만 두렵진 않았다.


 마침 오늘은 반장이 된 유진이의 어머니가 오시는 날. 유진인 3월 초부터 은수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야무지고 예쁜 아이였다. 은근히 반장이 되길 바랐는데 마침 딱, 반장으로 선출되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상황. 총회를 앞두고서 미리 상담도 마친 상태여서 은수는 마음 한편이 뿌듯했다. 완벽해,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응원하는 그때,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며 유진의 어머니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유진이 어머님이신가요?"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사뭇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된 상담은 나쁘지 않았다. 유진의 어머니는 소위 말하는 신도시 학부모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무척 수수했고 평범했다. 유진이의 칭찬을 늘어놓는 은수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 쳐주기도 했다. 


"어머, 걔가 그래요? 집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하면서도 딸 자랑이 나쁘지만은 않은 듯 연신 미소를 보이는 것을 보고 은수는 안심했다. 오늘 상담도 그렇게 잘 마무리되겠구나, 얼른 퇴근해서 집에서 남편과 치킨에 맥주 한 잔 하며 쉬어야겠다, 고 생각하는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들어왔다. 


"그런데 선생님. 유진이가 특목고에 진학하려고 하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알고 계신가요?"


당황했지만 최대한 전문적인 느낌을 곁들여 설명했다. 이 지역에 있는 특목고는 총 3개인데 그중에 유진이가 갈 수 있는 학교는 어디 어디다,라고 말하며 입시 요강을 건넸다. 마침 학년부장님께서 미리 보내주신 자료였다. 학업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님들이 오실 수 있으니 읽어보라는 내용과 함께.


유진의 어머니는 은수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그 정도는 이미 저도 알아요, 하는 느낌. 은수가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유진 어머니의 표정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미소도, 웃음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는 듯한, 그래서 둘 만 있는 교실이 어쩐지 너무 서늘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설명하고 있는데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진의 어머니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건 작년 자료잖아요. 아직 올해 정보는 하나도 없으신가 보네요?" 


은수는 그때 느꼈다. 때로는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 하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는 것을. 심지어 너무 정확한 사실을 눈앞에서 들으면 아주 큰 부끄러움이 된다는 것을.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사실 고입에 대한 준비는 제대로 해놓지 않았다. 중2가 무슨 고입이냐는 생각이 컸고, 언제나처럼 아이들과의 교감, 소통을 중시하는 학급 경영 철학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의 어머니는, 은수에게 얻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입에 대한 정보, 가산점, 그리고 특목고를 가기 위해서 지금부터 유진이가 준비해야 할 것들. 그런 것들을 원했지만 얻지 못했다. 자신보다도 더 정보력이 없는 눈앞의 담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순간이기도 했다. 


"선생님. 다음 어머니도 상담하셔야 하죠?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한 마디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다. 제가 좀 더 찾아보고 유진이를 지도하겠다는, 혹은 아직은 고입을 준비하기엔 너무 이르니 조금 천천히 함께 지도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할 겨를도 없었다. 유진어머니는 어퍼컷 하나를 날리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때 은수가 느낀 감정은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참으로 젠틀하고 멋진,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과의 대화가 어쩐지 더 차갑고 서늘하고 냉랭했다. 자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위로했지만, 뭐 별 일 있겠느냐고 다독였지만 


그날 느낀 그 느낌은 은수의 본능이 경고해 준 것이었다.

분명 언젠가, 비슷한 일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그런데 은수는, 그 해가 다 가기 전에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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