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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Apr 12. 2024

은수의 이야기 (6)

출근을 하면 따뜻한 물을 받아 홍차 티백을 하나 넣어 두었다. 은수는 꼭 투명한 유리컵을 사용했는데 맑은 유리컵 안에 홍차 특유의 붉은빛이 물감 번지듯이 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동시에 서서히 번지는 홍차향은 은수의 평온함을 지켜주는데 한 몫했다. 그간의 고생을 이렇게 보상해 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안정적이면서 뭐 하나 어긋남이 없는 학교 생활이었다.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체육대회 즈음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아이들은 한 없이 풀어질 준비가 되어있었다. 마침 2주 후에 체육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시험 성적을 잊기라도 하듯, 아이들은 체육대회에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보탰다. 반티 디자인을 빨리 골라서 먼저 찜해야 한다는 둥, 그래야 다른 학년과 겹치지 않는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더하고 빼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그즈음이었다.


마침 그날도 홍차 한 잔을 타서 여유를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유진은 세상 다정하고도 예의 바른 태도로 은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선생님!


공손하면서 단정하고, 바른 유진의 말투가 참 좋았던 은수는 유진이가 어떤 부탁을 하든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그래, 유진이 네가 뭔가 생각이 있겠지, 너는 다 계획이 있겠지.


- 저희 반티를 정해야 하는데, 혹시 선생님 수업 시간에 잠시 아이들과 회의를 해도 될까요?


깍듯한 예의도 더할 나위 없었다. 일방적으로 조르는 아이들, 다짜고짜 시간을 달라고 떼를 부리는 아이들 속에 유진인 단연코 빛이 났다.


- 몇 분 정도?


바로 허락하기엔 면이 서질 않아 물어본 질문일 뿐이었다. 사실 시험 끝나고 남는 시간엔 은수도 영화를 틀어주는 것 이외에는 할 것이 딱히 없었으므로, 유진의 제안이 반가웠다.


- 20분이요! 20분만 주시면 열심히 회의해 볼게요!

- 수업해야 하니까 시간 넘기면 안 돼! 딱 20분 잴 거야!


다짐을 받아 두곤 보냈다. 회의가 20분 안에 될 턱이 없었다. 다만 한 시간을 통으로 한 번에 빌려주긴 싫었다. 아이들과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싶었다.


우리 반은 얼마나 회의를 잘 해낼까.

얼마나 예쁜 반티를 고를까.


부푼 기대를 안고 교실에 들어갔다. 유진은 이미 교탁 앞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현준이는 서툰 글씨로나마 친구들의 의견을 칠판에 옮겨 적고 있었다.


- 자, 얘들아. 우리가 할 수 있는 디자인이  A, B 이렇게 두 개 거든? 지금부터 투표를 할게. 꼭 손을 들어줘. A가 좋은 사람!?


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준은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어림 잡아도 반은 찬성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어서 B를 선택한 사람도 얼추 절반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딱, 한 표가 부족했다. A든 B든 한 가지로 결정하려면 딱, 한 표가 모자랐다.


- 얘들아. 다시 정확히 들어. 기권은 없어. 무조건 골라!


유진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다시 손을 들어 마음을 표현했다. 한 차례, 두 차례가 지나도 결과는 똑같았다. 계속 손을 들었다 내리는 게 짜증 났던 민혁은 퉁명스레 말을 뱉어냈다.


- 아, 진짜. 누구냐? 빨리 안 드냐?


그래, 은수도 궁금했다. 누구니? 도대체 아직까지도 손 안 드는 사람. 다른 친구들 애타게 기다리는 걸 왜 몰라, 이렇게 피해를 줘도 된다고 생각하니,라고 다다다 다다 쏟아낼 준비가 된 은수의 시선 끝에 다다른 것은 반 아이들의 눈초리를 힘겹게 받아내고 있는 지은이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지은이를 노려보는 듯했다. 너 왜 참여 안 해? 너 때문에 지금 진행이 안 되잖아, 넌 생각이 없냐? 아무거나 선택해서 손 들라고. 아 진짜 답답해 죽겠네.라는 말들이 말풍선이 되어 교실을 떠다녔다. 은수가 있었으니 망정이었다. 만약 없었다면? 풍선 속 말들은 소리로 바뀌어 지은이 주변을 맴돌다 녀석을 찔렀을 것이다. 콕, 콕, 콕.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를 깨고 싶었다. 얘들아, 왜 그래. 지은이한테 시간을 좀 줄까?라고 이야기하며 어른스럽게 조언하고 회의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슬쩍 교탁으로 다가가 정리를 하려는 그때, 은수는 봤다. 아니, 보고야 말았다. 절대 보지 말았어야 할, 유진의 눈빛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진의 눈빛이었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경멸, 무시, 비웃음, 조롱... 이 모든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그 눈빛이 지은이를 향해 있었다.

지은이는 그 눈빛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열지 말았어야 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이었다.




은수의 유리컵에 담긴 홍차 티백은 말없이, 하지만 천천히, 분명히

맑은 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진: UnsplashTeaCora Rooib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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