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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보자 Sep 05. 2020

혼자 사는 남자의 혼술

혼자서 뭐하고 놀지

난 술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제철 맞은 딸기처럼 새빨개져 같이 마시는 사람들이 마시는 내내 괜찮냐고 물어본다. 난 ‘물론이지’라며 당당하게 말하고 계속 그 자리를 즐기다, 어느 순간 구석에 가서 조용히 잠이 들어 버린다.


그렇다. 나는 흔히 말하는 알코올 쓰레기이다.


내 육신은 알코올을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기에,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금주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러기에 세상은 넓고 맛있는 술은 그에 비례할 만큼 많았다.


이성과 욕망의 갈등 속에서 내가 찾아낸 해법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윗사람들이 술을 안 마시는 사람보다 마시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명분을 만든 것이었고, 꾸준히 술을 즐겨왔다.


인생 첫 번째 술은 아마도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였던 것 같다. 친구 집에 모여 부모님 몰래 마시던 소주. 그 날 빨간 괴물로 변신한 후 변기를 부여잡은 채 괴성을 지르는 나를 보면서 술이란 사람을 다른 존재로의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마법의 묘약임을 알게 되었다.


혼자 마시는 술의 시작은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직장생활 3~4년 차 때부터 혼술을 즐겼던 것 같다. 그즈음의 난 승진과 매너리즘과 인생의 중대한 고민들을 다 짊어졌을 때였다.


불 꺼진 거실의 소파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네덜란드에서 건너온 녹색의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 아이가 있었다. 술 마신 지도 오래되었는데 혼자 맥주나 마셔볼까 하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독대를 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거품과 맥주가 빚어내는 달콤 쌉쌀함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어른의 맛이구나’


삶이 한 단계 레벨업 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막힌 속이 뚫려버리는, 내 안 깊숙한 곳까지 청량감이 밀려들어왔다.


그때부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조용한 밤에 캔맥주 뚜껑을 땄다. ‘따악’ 정적을 깨는 그 소리는 오늘 하루 수고했다는 의미의 박수 소리 같았다. 혼술은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는 나에 대한 보상이자, 즐거움이었다.


맥주 맛에 눈을 뜰수록 다양한 맥주를 찾게 되었다. 마침 편의점에서 세계맥주를 4캔에 만원에 파는 판촉행사를 하여 집에서 전 세계 맥주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인생의 동반자가 된 맥주와 더욱 친해지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아이들을 구비해 놓고 싶었지만 그때 살았던 곳의 냉장고가 작아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면 세계맥주를 종류별로 갖춰놓아야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 올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새 집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밀키트나 반찬을 사는 것이 아닌 맥주 쇼핑이었다. 냉장고 한 칸에 6종류의 맥주가 4개씩 총 24개가 들어갈 수 있었다. 넉넉하게 30개를 사 한 칸을 채웠다. 혼자 사는 남자의 쓸데없는 로망을 이룬 것 같아서 뿌듯했다.


진열된 맥주는 안구 만족용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 과일 칸에 있는 여분의 맥주를 먼저 마신 후, 내 욕망의 대상들을 마시는 게 맞겠지만, 그것들의 존재의 이유는 눈요기였기에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새 맥주들을 사 왔다.


로망의 결과물


낯선 서울에 혼자 지내면서, 코로나19로 외부활동이 자제되면서 혼술의 빈도도 늘어갔다.


샤워 후 멍하니 앉아 즐기는 혼술은 공허함을 물리쳐주서 좋았고, 넷플릭스를 보면서 마시는 혼술은 즐거움을 배가시켜 좋았고, 책과 함께하는 혼술은 왠지 술을 마시는 과정 자체가 유익해진 느낌을 들게 해서 좋았다.


집에서의 혼술은 편안해서 좋았고, 옥상의 혼술은 괜한 감성이 만족되는 듯 해서 좋았고, 한강에서의 혼술은 어쩐지 서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좋았다.


한강공원 야경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게 인생사라, 헤어질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6열 종대로 3개월 동안 각 잡고 있던 아이들과 하나하나 만남을 가지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지금은 냉장고가 비어있지만, 건강을 고려하여 빈도를 줄이고자, 새 술을 채워 넣지 않았을 뿐 혼술을 끊은 것은 아니다. 아직 이 정도 효능을 갖춘 일상의 보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혼술이란 감염으로부터의 걱정을 막아주면서 즐길 수 있는 여가활동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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