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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명 Jun 28. 2022

존재와 사유로 채우는 여백의 공간

앤트러사이트 연희

 

'나'라는 존재를 담백하게 사유하고 싶다면 찾게 되는 공간이 연희동에 있다. 공간의 여백을 빛과 어둠으로 채워 깊은 사유와 차분한 상상을 이끌어내는 마법을 일으키는 곳, 앤트러사이트 연희의 공간 언어를 탐구한다.



묵직한 첫인상


앤트러사이트는 대단히 묵직한 첫인상을 갖는다. 건물의 외관과 내부 모두 검은색으로 차분하게 통일되었다. 창밖의 연희동 거리를 배경 삼아 바와 좌석, 로스팅 룸이 공존한다. 하지만 공간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기보다 어둑한 그림자에 스며든 듯 은은한 질감과 실루엣이 눈에 담기는 편이다. 이러한 공간의 무드는 지금 이 순간의 공기와 기분을 한 단계 낮은 상태로 내려앉게 한다.



파블로 네루다


주문했던 커피의 이름은 파블로 네루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유명 시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필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칠레 공산당에 가입하여 해외로 망명을 당한 후 세계 각지를 떠돌며 글쓰기에 전념했다. 왕성한 창작 활동을 통해 여러 사람들의 지탄과 감탄을 받은 그이다. 정치적 행보로 인해 보헤미안적 삶을 살게 된 작가의 이름을 커피 블렌드에 사용했다. 이렇듯 앤트러사이트는 브랜드에 문학적 감성을 담아내는 선택을 곁들인다.





빛과 어둠의 여정


1층과 2층을 잇는 연결 통로는 적막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다. 앞서 들어온 출입구와 2층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빛만이 유일한 지표이며 길잡이 역할을 한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결국 빛의 끝에 도달하는 여정은 분위기 좋은 카페 앤트러사이트 연희점만이 주는 고유한 경험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강렬한 시간을 체험하게 하는 집중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두 번의 반복


길게 놓인 두 개의 좌석은 공간의 그림을 완성하는 두 개의 레이어이다. 2층에 들어서자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실루엣과 창밖의 풍경이 한 폭의 작품을 그려낸다. 인상적인 점은 의자에 앉은 이들 역시 창문 쪽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실루엣과 배경을 보며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이처럼 같은 구조의 동일한 풍경을 한 공간 안에서 반복시키는 흥미로운 시각적 연출을 앤트러사이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각기 다른 개성의 사람들이 찾아와도 앤트러사이트의 분위기 안에서 동일한 실루엣의 존재로 그려지니, 개인의 개성을 공간만의 어법으로 통일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비와 변화


하나의 좌석은 직선이며 다른 하나는 곡선으로 되어있다. 각도의 변화가 있어 시각적인 대조를 이루고 지루하지 않은 변화를 생성해낸다. 어두운 주황색으로 칠해진 미니멀한 디자인의 의자는 긴 테이블을 따라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리듬감을 형성한다.



창조의 유(有)


창조는 유(有)에서 시작된다. 주위에 존재하는 무언가로부터 생각을 얻거나 직접 사용함으로써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무언가가 '있음'으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하는 구조인 것이다. 내가 있음으로 삶이 창출되고, 어딘가에 있는 공간을 향해 나아감으로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이라는 접점을 연다. 있는 것들끼리 부딪히고 상생하는 관계가 곧 세상이다. 우리는 오늘도 나의 있음과 상대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앤트러사이트 연희는 '최소한의 있음'을 통해 '최대한의 상상'을 끌어낸다. 앉음이라는 최소한의 행위만을 보장하는 좌석이 넓은 공간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등을 기댈 곳도 없고 천장과 창문 바닥 모두 넓은 면적으로 비워져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드넓은 공간을 걷고 보고 앉아보며 최소한의 것들만 배치되어 있음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없음을 상상'하게 된다. 왜 이러한 디자인을 선택했을까? 이 공간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등을 말이다.



이렇듯 공간 이용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만을 마련하고 이외의 요소는 상상과 추상에 열어놓았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시각적으로 주목받는 대상이자 주인공은 결국 사람이다. 여백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사람들의 존재감과 상상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존재가 은은하게 드러나고 동시에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공간인 것이다.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것은 2018년, 저녁 시간 재즈 공연 프로그램이 있어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긴 테이블은 객석이 되어 맞은편 통창의 가운데 선 뮤지션을 바라보는 재미있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공간 자체로도 힘과 메시지가 넘치는 편이지만, 조금 더 다채로운 문화 프로그램으로 사람들과 관계하는 풍부한 시간을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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