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에서 강사로 지내고 있는 전임(김민희)은 열흘 앞으로 다가온 촌극제 연출을 위해 오랜만에 외삼촌 시언(귄해효)에게 SOS를 했다. 몇 년 전 외삼촌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강릉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배우 겸 연출자다. 갑자기 연출 제안을 했지만 외삼촌은 모든 일을 멈추고 조카를 위해 달려왔다. 사실은 40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대학 1학년 때 촌극제를 연출한 기억을 더듬어 온 것뿐이다. 이유야 어떻든, 오랜만에 대학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살아 있음을 느낀다. 교정의 가을 분위기,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노스탤지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 즐겁다.
한편, 촌극제는 총 7명이 있었으나 연출자(하성국)가 세 여성과 스캔들을 내며 사라지는 바람에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시언이 연출을 맡아 열흘 동안 남은 네 명과 맹연습에 돌입하고 있다. 그러던 중 외삼촌은 전임을 예뻐한다는 텍스타일과 교수 은열(조윤희)과 가까워지며 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몇 차례 셋이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가 형성되고 전임은 외삼촌과 교수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타들어 가는 전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은 차고 기울어져 커져간다.
여전히 자신만의 길을 가는 여유
영화 <수유천>은 홍상수 감독의 32번째 신작으로 제77회 로카르노 국제 경쟁 부분에 공식 초청되었다. 그동안 제작실장으로만 이름을 올렸던 김민희가 주인공 전임을 맡아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여전히 국내 활동은 전무하나 해외에서 값진 결과를 낸 두 사람의 협업이 이번에도 통했다. 특별한 메시지나 주제로 시작하지 않고, 현재 상황과 날씨, 계절, 소수의 스태프로 꾸려진 제작 방식을 고수한다.
홍상수 사단으로 불리는 특정 배우진의 케미는 여전하다. 자전적인 이야기 속에서 허구의 경계를 활짝 열어둔 상황, 해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화룡점정은 오랜만에 뮤즈로 복귀한 김민희다. 오랜만의 특유의 말투를 듣는 재미, 자연스럽게 나이 든 모습이 극중 전임의 상황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새치와 주름진 얼굴은 마흔을 넘은 김민희 인생의 한 부분으로 해석된다. 영화 내내 거의 한 벌로 멋을 내고 질끈 묶은 헤어스타일을 한 꾸밈없는 모습이 화려한 스타였을 때보다 편안해 보여 반짝반짝 윤이 난다.
극 중 캐릭터의 입을 빌려 현실을 슬쩍 끌어오는 능청은 홍상수의 작품을 꾸준히 봐왔다면 즐거운 코미디로 다가올 것이다. 작품을 통해서라도 현실의 바람을 이루고 싶은 판타지가 불쑥하고 끼어드는 점도 여전하다. 대중의 조소와 냉소에 작품으로 답하는 듯한 전언과 자기 반영이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전임이 직물 패턴 예술가이자 강사인 점은 의미심장하다. 조카의 작업실을 방문한 외삼촌에게 작업 방식과 방향을 설명하던 전임은 시간 투자만큼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라고 답한다. 삶이 거대하게 직조된 인연과 관계라고 본다면. 필연과 우연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패턴을 형성하고, 연속된 상호 관계와 선택에 따라 다양한 창조물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임은 매일 수유천에 나와 강물을 스케치하며 자연을 모방해 베틀로 패턴 연작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작품, 관계, 촌극 뭐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별거 중인 외삼촌과 교수가 가까워질수록 불편함이 가중된다. 그러던 중 마지못해 나간 식사 자리에서 뜻밖에 기쁨을 만난다. 한강-중랑천-수유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물의 생명력과 역동성에서 영감받는다.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는 자연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던 인생이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음식점 옆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무언가를 찾은 것처럼 미소 지으며 영화는 끝난다.
김민희 만큼의 시그니처라면 권해효다. 불러주는 곳 없는 퇴물 예술가를 여전히 존경과 애정을 마다하지 않는 팬을 만난 시언을 맡았다. 홍상수의 오랜 페르소나답게 현실과 판타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농익은 연기로 지질하고 궁색한 남성의 표상을 이었다.
특히 동반 출연한 아내 조윤희와 썸 타는 관계로 설정돼 웃음을 유발한다. 촌극제를 준비 중인 연출자의 현실 촌극은 블랙코미디를 유발한다. 두 사람이 실제 부부 사이임을 알고 나면 재미있는 시각으로 보인다. 특히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의 비밀 많은 경찰서장과 전혀 다른 분위기라 흥미롭다. 어떤 옷을 입어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해석력이 잔잔한 영화의 작은 긴장감을 만들어 내 마지막까지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