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영화 <러브픽션>
적당히 영화같고 적당히 현실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몇 년째 변함없이 러브픽션을 꼽는다. 내 답에 대한 반응은 주로 두 가지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러브픽션? 무슨 영화야?”라는 반응이 하나, “아, 그 공효진 겨털 나오는 영화?” 라는 반응이 나머지 하나. 맞다, 그 영화다. 뭇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자 배우 중 한 명인 하정우가 주연으로 나왔음에도 영화 전반적으로 철철 넘쳐흐르는 B급 감성 때문에 아는 사람이 흔치 않은 영화이자 공효진의 무성한 겨드랑이 털이 나오는 그 영화.
대부분의 경우 나는 상대방이 “그 영화가 왜 좋아?”라고 묻기도 전에 이유를 줄줄 대고 만다. “저는 하정우가 너무 멋지게 나오는 것보다 찌질하게 나오는 게 괜히 좋더라구요. 욕도 찰지고 맛깔나게 하는데 그것도 왠지 섹시하구요, 글이 안 풀리면 화병을 깨뜨리는 괴팍한 또라이 작가로 나오는 것도 좋아요. 하정우가 공효진한테 첫눈에 반하고 나서 꽃바구니와 함께 보낸 편지도 진짜 귀엽구요, 술 취하고 욱해서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공효진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최고예요. 그리고 영화가 비현실적이면서 디게 현실적이예요. 특히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난 이후의 태도나 마음의 변화를 참 잘 잡아냈어요.”
이토록 입이 마르도록 영업 아닌 영업을 했지만 내 말을 듣고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대체로 상대방이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 그래요? 한번 봐야겠다.”하고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대답을 하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 적이 더 많았으니까. 뭐,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 말고도 더 남아있지만 이 글을 쓴 목적이 러브 픽션에 대한 감상문도 아니고 영업글도 아니니 그건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자.
매해 가을 겨울이 찾아오면 나는 이 영화를 꼭 한 번 이상 본다. 위에서 말한 ‘하정우(극 중 ‘구주월’)가 공효진(극 중 이름 ‘희진’)에게 고백하는 장면’만 찾아서 볼 때도 종종 있다. 작년에도 보았고 얼마 전에도 보았는데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누군가 나를 절절하게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그 순간이 그리워서'인 듯하다.
그 장면에서 구주월은 술자리 게임에서 짓궂은 어른들이 희진에게 자꾸만 술을 마시게 하자, 흑기사를 자청하고 급기야는 일부러 벌칙에 걸려 연신 술을 들이킨다. 그러다 동석한 사람 중 한 명과 시비가 붙는다. 그는 주월에게 “아, 우리 구작가님이 희진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근데 뭐, 뭐할 수 있는데? 뭘 보여줄 수 있는데?!”하며 주월을 자극한다.
그러자 주월은 욕지거리와 함께 일어나 마치 1인극의 주인공이 되어 대사를 읊듯 모두의 앞에서 희진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다. 처음에는 ‘쟤는 뭔데?’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나중엔 호탕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짝짝 치고 그의 고백에 호응해준다. 희진은 약간 기가 차면서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월을 바라본다.
그런 표정일 수 밖에. 술게임을 하기 전 오고갔던 대화에서 “(시사회를 진행한 영화 이야기를 하며) 저는요, 그냥 남자가 여자한테 고백하는 그 부분이 좋았어요. … 고백이라는 게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잖아요. 배경이 다 사라지고, 오직 둘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한 희진이었다. 심지어 “희진씨는 그런 고백 받아본 적 있어?”라고 이어지는 질문에 “없어요, 누가 나한테 그런 로맨틱한 고백을 해주겠어요.”라고 대답하기까지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크, 정말 영화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몇 번을 되돌려 봐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 볼 때마다 여운이 남아서 영상이 끝나고 멈춰진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한다. 희진의 대사 중 ‘고백이라는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는 말을 종종 곱씹어 보기도 하고.
저렇게 영화같은 고백을 실제로도 듣고 싶은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로 시작하는 관계에서라면 화려하고 요란한 고백보다는 오히려 투박하더라도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단순한 고백이 훨씬 좋다.
지난 사랑의 시작에서 들었던 말들이 모두 그런 모양새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맞춘 뒤에 멋쩍고 초조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나는 네가 좋은데 우리 조금 더 만나면서 서로를 알아가보지 않을래?”하고 조심스레 묻던 말이나, 한강을 함께 걷다가 갑자기 던진 내 질문에 상기된 얼굴로 “저 지금 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못 들었어요.”라는 순수하게 털어놓던 말들이 내게는 무엇보다 극적으로 다가왔었다. 나와 그를 둘러싼 주변 배경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우리 둘만 세상에 존재하는 듯 했더랬었다.
사실 작년 여름엔 그 극적인 순간을 오랜만에 경험할 뻔도 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몹시 좋아하게 된 사람이 생기자, “저는 **씨가 너무 좋아서 더 친해지고 싶고 더 알고 싶어요.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고 그냥 이 마음을 너무 말하고 싶었어요.”라는 멋대가리 없는 고백으로 그 순간을 내 손으로 연출하려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그사람에 대한 마음은 여름에 한 번, 연말에 또 한 번 접게 되면서 그 시나리오는 결국 크랭크 인 되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사장되어버렸지만.
하지만 때때로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몇 번은 더 만나고 고백해야지.’라고 다짐하지 않고 세번째로 그와 만났을 때, 문득 문득 혀 끝에서 맴돌고 머릿속에서 찰랑이던 “좋아해요!”라는 그 말을 즉시 그에게 털어놓았더라면 우리의 관계가 조금은 변했을지. 아마 그때 말했더라면 결과야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겪을 몇 안되는 극적인 순간을 가장 최신 일자로 업데이트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엔 생각이 너무 많았다.
뭐, 그래봐야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다. 내 손을 떠난 인연에 미련을 두고 싶은 마음은 더 이상 없다. 다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왠지 올해는 그 극적인 순간이 한번쯤 있을 것만 같은 희망적인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든 다른 이의 입에서 말해지든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작년처럼 망설이다가 끝내는 일은 없도록 할테다.
만약 올해 내게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긴다면, 좋아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러브 픽션의 구주월이 낯선 이들 앞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희진에 대한 마음을 토로했듯이 나 또한 그에게 내 마음을 최대한 가공하지 않고 꺼내 보일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그를 큐피트의 법정에 세운 뒤에 나는 답을 찾지 못해 다소 혼란스럽고 조금은 절망적인 몸짓과 목소리로 거침없이 물어보리라.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당신에게 누구여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