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사람입니다.
흔히 상상하는 호쾌한 몸매에 나뭇가지나 당근으로 만든 근사한 이목구비를 갖춘 눈사람이라면 좋겠지만, 실상은 동네 아이들이 만든 찌그러진 두 개의 눈 덩어리 형상에 가깝습니다.
아, 아, 그게 불만은 아닙니다. 이 말이 진심이라는 건 좀 있다가 설명할게요.
나는 추위를 싫어하는 눈사람이었습니다.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고, 늘 꽁꽁 얼어있어야 한다니....
그렇지만 추위가 싫어서라기보다는 다른 계절이 궁금했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꽃이 향긋한 봄도 있고 태양이 뜨거운 여름도 있고 바스락거리는 가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부터는요.
늘 나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최승자, 「이 時代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제 젊은 시절, 딱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 한자리에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것이 싫었고, 지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란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몇몇은 눈사람이라며 웃어주기도 했지만, 또 몇몇은 괜히 발로 차기도 했습니다. 왜 나는 이 모양인지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나는 새봄이 오면 내가 녹을 것이라는 사실이 담담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미 좀 녹았지요)
사람들이 기다리는 봄이 오면 나는 녹을 겁니다.
더 이상 눈사람이 아니겠지요.
물론 그게 끝은 아닙니다.
따스하게 녹은 눈사람은 물이 되어 땅으로 스며들거나 공기 중으로 증발하여 꽃과 나무의 뿌리에 닿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원하던 다른 계절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투박한 내 생김새가 속상한 일이 아닌 거예요.
게다가 다시 구름이 되어 언젠가는 다시 눈으로 내릴지도 모릅니다.
다만 지금 이 모습일 때 내가 지내온 날들을 잘 정돈할 수 있는, 그래서 눈사람의 이야기를 정겹고 따스하게 나눌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에게 보다 나 자신에게 토닥임이 될 수 있는 글을요.
나를 잘 들여다보고, 나에게 해주고 싶던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렇게 오랜 시간 나는 언제나 나의 친구였다는 걸 말해줄 수 있는 그런 글말입니다.
저의 동료(?) 올라프가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 앞에서는 녹는 것도 감수할 수 있지."
앞으로 글을 쓰면서 나 스스로 녹는 모습에도 평온하게 손잡아줄 수 있는 눈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