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을 기다리는 밤
1.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하다는 건 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면 우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은 더 많은 빛을 감지하도록 작동하면서 어둠을 익숙하게 만든다.
여기서 모순은 이거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빛이 없으면 시각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도 눈은 빛을 찾는다. 시각 세포들은 어둠을 비상사태라고 받아들여 빛의 흔적을 치열하게 찾는 것이다.
그러나 치열하게 빛의 흔적을 찾는다는 믿음은 뇌의 낭만적인 착각이다. 눈은 사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지 않는다. 눈은 빛이 없는 환경에서도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눈은 동공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야를 유지하려고 하고 이 때문에 빛을 최대한 받아들이기 위해 동공을 키운다.
눈은 빛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 빛이 부족한가, 빛이 어디에 있나, 그걸 고민하지 않는다. 빛이 부족하다면 그냥 부족한 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동공의 크기를 확장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빛이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것이 최선인 것을 안다. 불만도 없고 불평도 없다.
하지만 빛을 보기 위해 어둠으로 갈 필요는 없다.
2.
나는 실제로 반딧불을 본 적이 없다. 혹시 봤을 수도 있지만 기억에는 없다. 우선 반딧불은 어두운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실제가 아닌 영화나, 만화, 드라마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반딧불은 주로 낭만적이거나 동화적이거나 신비롭거나 아름다운 장면에 등장한다. 마치 하늘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온 것 같은 불빛들을 보며 사람들은 저절로 탄성을 내며 환상에 빠진 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반딧불에게 사실 그 빛은 생존을 보장하는 비장의 무기이다. 물론 짝짓기에도 사용되니 낭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천적에게도 일종의 경고등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고 다슬기나 달팽이 같은 먹이를 찾는 데에도 유용한 생존 도구이다. 연약한 생명체인 반딧불에게 빛이 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빛을 내는 모습을 보며 “어머나, 아름답다.” “우와, 별이 내려온 것 같아” “요정들이 날아다니는 것 아닐까” 같은 감탄을 한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저들의 생존 방식을 인간이 보는 방식대로 해석하고 포장하고 있지만 반딧불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반딧불을 계속 보고 싶어서 그들이 계속 살 수 있는 환경을 지키는 노력이라도 한다면 모르지만.
그런데 나는 왜 반딧불을 본 적이 없을까? 그러고 보니 반딧불을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둠 속을 떠다니는 반딧불이라는 존재가 있나 보다, 했을 뿐이었다. 깊은 어둠 속에 내가 갇히기 전까지는.
3.
깊은 밤에 잠이 깬다.
목이 마른 걸까? 오줌이 마려운가?
왜 잠이 깼는지 알아채는데 10초 정도 걸린다.
오늘도 잠이 깬 건 역시 통증 때문이다.
젠장.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해본다. 들숨과 날숨, 호흡 사이에 통증이 약해져서 다시 잠들기를 바란다. 그러나 바람은 바람일 뿐이다. 통증은 점점 더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남편이 깨지 않게 스르륵 유령처럼 마루로 나간다.
시계를 보니 삼십 분 남짓 잠들었었다.
이미 잠은 다 달아났다. 통증은 내 정신을 아주 맑은 상태로 만들어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한다.
컴컴한 마루에 앉아 통증에 온 정신을 빼앗긴 채 우두커니 앉아 있다.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어둠 속 세상에는 통증과 나, 둘 뿐이다.
머리끝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아프다. 식은땀이 난다.
쑤시고, 얼얼하고, 저리고, 뻣뻣하고, 근육을 통과해 내장까지 깊숙하게 아프다. 그리고 아주 불쾌하다. 아픈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기분이 매우 안 좋다. 뭔가 아주 무례하고 저급한 대우를 받는 기분이다.
이러다가 내 몸뚱어리를 다 못 쓰게 되는 건 아닌가 싶도록 아프다. 의사들도 대답을 못 해주는 통증.
이렇게 밤새 통증에 시달리다 진이 빠져 아침이면 잠이 든다. 졸려서 잠을 자는 게 아니라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는 셈이다.
남편이 말하길, 하루는 밤에 자다가 깼는데 내가 자는 와중에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있더란다. 통증은 무의식도 뚫고 나온다. 독한 놈...
내 세포들은 고단함과 지침, 무기력이 기본 모드가 되었다.
통증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구석에 몰려있다. 통증은 짜증, 화, 당황, 무기력, 조바심, 불안, 절망으로 버무려진 뾰족뾰족한 가시 덩어리를 계속 내게 던져댄다.
그렇게 통증은 나를 소진한다. 나는 그저 어둠에 앉아서 분해되고 소멸하는 나를 지켜볼 뿐이다.
캄캄한 동굴. 끝이 뚫렸는지 막혔는지도 모르는 동굴. 그 안에서 만나는 허무는 냉소적으로 말한다. 희망은 사치라고.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너무 지쳐서 허무가 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귓속에서 윙윙거릴 뿐이다.
그러는 중에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득 나는 다시 떠오르고 싶다.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 통증의 어둠 속에서 다시 동공을 크게 열고, 내 멋대로의 해석이라도 신비한 힘을 주는 반딧불을 만나고 싶다.
아픈 사이사이에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나뭇잎의 진해지는 초록색, 초록색으로 우는 새소리에 기뻐하고 다정한 마음이 살아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지루하도록 당연했고 자연스러웠던 내가 어둠 저 편에 있다는 걸 느낀다.
그렇게 다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농담을 하는, 그리고 슬픔을 보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어둠 속에서 통증과 함께 얌전히 앉아 반딧불을 기다린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반딧불을. 내 안의 빛을 찾아줄 반딧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