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인 2010년에 만들어져 그로부터 7년 후인 2017년 7월 한국에 정식으로 개봉한 영화가 있다.
바로 플립(Flipped,2010)이다.
이 영화의 명대사는 단연 위의 문장일 것이다. 영화가 아닌 저 문장을 먼저 접했던 나는 그저 생소하기만한 'iridescent'라는 단어의 뜻을 궁금해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찾아낸 iridescent의 뜻은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무지갯빛의'였다.
이상했다. 단어의 뜻을 알았는데도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무지갯빛이 최고라는 것 같긴한데, 왜일까. 색이 일곱 가지나 있어서? 화려해서? 희망적이어서? 어떤 사람이길래 비교할 수 있는 게 없을만큼 대단한 건지 궁금했다.
도대체 무지갯빛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줄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어릴 때 동네로 이사를 온 '브라이스'라는 소년의 눈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반할 만하긴 했다, 장담한다). 그리고 그 '눈'의 여파는 무엇보다 강하다. 이로 인해 거의 6년 간 줄리의 맹목적인 사랑은 계속되고.
그러던 와중 '그림의 부분들은 그저 그것 그 자체지만 그것들을 합친 하나의 그림은 마법이다'라는 아버지와, 브라이스의 할아버지로 인해 '사람은 부분만큼이나 전체가 중요하고, 전체가 부분이 합쳐진 것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브라이스의 눈 때문에 브라이스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는 줄리. 이를 듣고 줄리의 아버지는 그 아이의 전체는 어떠냐고 묻는다. 항상 전체의 풍경을 봐야 한다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그 후, 줄리와 브라이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줄리가 높은 나무에 올라가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는 장면이었다.
일출과 일몰, 새벽 공기와 해질녘의 바람, 공기의 촉감과 풀내음 등의 조각들이 모여 오롯이 그를 위한 나무 위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나무 위의 줄리는 부분들을 느끼고, 그들이 만들어 낸 광활한 전체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경험은 앞으로 줄리가 무지갯빛의 사람을 알아보는 밑바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결국 무지갯빛의 사람,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사람은 바로 전체가 부분이 합쳐진 것보다 빛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체 = 부분들의 합'이 아닌, 각각의 조각들이 각자의 빛을 내면서 조화롭게 하나로 합쳐지는 것. 합쳐진 전체의 빛은 또 다른 색의 여러가지 빛을 내뿜고, 부분들의 합보다 더 눈부신 빛을 낸다. 각각의 빛깔은 유지한 채.
그리고 이런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같은 무지갯빛의 사람일 거라 확신한다. 분명히.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
나의 편견과 상상, 환상에 그 사람을 끼워맞추지 않는 것.
그 사람이 가진 부분부분의 가치를 느끼고, 전체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
끝없이 변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을 사람.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고,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