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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Aug 29. 2018

통역사의 노트테이킹

어머, 통역사님, 노트에 지렁이 붙었어요!

가끔 노트를 흘깃흘깃 훔쳐보시는 분들이 계시다. 한글도 보이고, 영어도 분명히 보이는데? 어라, 저건 한자인가? 아니, 왜 이모티콘을 그리고 있어? 통역이 장난이야?


통역사가 필기하는 모습을 보고 연사가 하는 말을 전부 받아 적은 뒤 그걸 줄줄 읽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다. 그러나 기계가 아닌 이상 쓰는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수기로 말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통역사가 적는 내용은 기억을 불러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암기력과 이해력이 기본이고, 필기는 부차적이다. 연사가 발화하는 내용을 듣고, 이해하고, 정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필기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너무 부실하게 적으면, 들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고, 너무 자세히 적으면, 적는데 정성을 쏟느라 정작 연사가 말하는 내용을 놓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그 사이 어디엔가 존재하는 절묘한 균형을 찾아서, 툭 치면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익숙한 자신만의 기호와 체계와 방식으로 우리는 각자의 노트를 채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의장님, 내외 귀빈 여러분, 시민 사회 여러분, 제61회 유엔 마약위원회 회의에서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저희 유엔에이즈계획은 마약 단속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인권존중을 기반으로 개개인의 건강과 복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마약을 복용하고 주사하는 사람들은 HIV 감염 위험이 가장 높은 집단에 속하면서도, 의료나 사회서비스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지난해 제60회 마약위원회 회의 때 성명을 발표했던 이래 마약 사용자 관련 통계가 나아지지 않았다는 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위의 노트를 읽으면 이렇게 된다.


좌측 상단 대각선 두 줄은 연사가 새로운 문장을 발화했다는 뜻이다. 해당 기호 앞까지는 이전에 발화했던 내용으로 이미 통역이 끝난 문장이다.


중간중간 보이는 가로 실선은 문장을 구분하는 선이다.


D.G는 distinguished guests의 준말, 내외 귀빈 여러분으로 퉁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이렇게 기록한다. 자매품으로 ladies and gentlemen을 줄인 L.G도 있다.


그 아래 C, S는 civic society를 나타낸 것인데, c 위에 지붕을 씌운 까닭은 조직이나 단체를 표기하기 위해서다. c 위에 지붕을 씌웠을 때의 보다 보편적인 의미는 회사(company)지만, 위의 경우 시민단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g 위에 지붕을 씌워서 정부라는 의미의 government, p 위에 지붕을 씌워서 민간부문이라는 의미의 private sector, b 위에 지붕을 씌워서 business를 나타낸다.


S나 H 옆에 작은 동그라미를 표기한 까닭은 사람과 관련이 있는 영역인 까닭인데, S 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 경우 보통은 사회(society)를 가리키지만, 위의 필기에서는 안전(security)을 표기할 때도 병용했다. 머리에 작은 동그라미를 단 H는 health를 의미한다.  


기타 기호나 화살표는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란다(출처: 동시통역사 최정화 교수의 비주얼 노트테이킹!).



위의 협상테이블 기호를 나는 회의라는 의미로도 병용하고, 의장을 나타내는 의자 역시 장관, 위원장, 사무총장 등 조직의 수장을 나타내는 말로 두루 쓴다. 증가를 나타내는 우측 화살표는 증가 외에도 향상이나 강화 등에도 사용한다.


내가 미래나 과거를 표기한 기호는 노트 우측 하단의 꺾쇠괄호다. 이와 같은 시제 표시나,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나타내기 위해 표기한 우측 중간 세로 화살표 같은 것들이 의외로 톡톡히 제 역할을 한다. 물결무늬 표시는 언제나 항상 그러하거나 계속 진행 중인 일, 밑줄 한 개는 강조, 밑줄 두 개는 최상급을 나타낸다.


이하 연설문 원문을 참고로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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