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면 좋지만 혼자라도 괜찮아요
통역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동시통역과 순차 통역이다.
동시통역은 따로 마련된 부스 안에서 기기를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연사 발화 시 통역사는 한 문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연사의 말을 따라가며, 다음 문장을 들음과 동시에 이전 문장을 통역한다. 연사 한 명 외에 대다수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며, 따로 통역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국제회의, 국제 행사, 속보 전달 시 많이 쓰인다.
순차 통역은 연사 바로 옆에서 이루어진다. 연사가 3~5분 분량을 발화하면 통역사가 정리해서 통역한다. 한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비율이 5:5 정도일 때 효과적인 방식이며 통역으로 인해 회의 시간이 2배 정도 길어진다. 통역사의 펜과 노트만 있으면 가능한 형태이므로, 동시통역을 위한 부스나 기기를 설치하기 어려울 때 대안적으로 순차 통역이 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참석자가 수백에 달하는 국제회의에는 적합하지 않은 형태로 양자 간 면담, 화상회의, 전화 통역, 수행 통역, 비공식 회의 등에 주로 쓰인다.
코엑스에서 인이어로 들려오는 그놈 목소리를 들으셨다면 그건 동시통역, 대통령 곁에서 팔이 떨어져라 필기를 하고 있는 통역사를 보셨다면 그건 순차 통역 현장이다.
통역에는 통역사 외에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따라서 통역을 연습할 때도 혼자보다는 최소 두 명 이상이 함께 하는 것이 좋다.
보통은 마음 맞는 두 명에서 네 명 정도가 함께 한다. 정치, 외교, 경제, 사회, 환경, 보건, IT 등 특정 분야를 정한다. 주 단위로 분야를 바꿔가며 두루 공부하거나 필요할 때는 한 분야만 깊게 판다. 각자가 해당 분야에 맞추어 국문 연설문과 영문 연설문을 준비해온다. 준비한 연설문에 해당하는 용어집도 미리 만들어온다.
두 명으로 예를 들면, 만나자마자 우선은 각자가 준비한 용어집을 상대에게 전달한다. 용어집에는 주로 고유명사나 해당 분야에서만 쓰이는 전문용어가 들어 있다. 사전 정보를 전달한 뒤 돌아가면서 준비한 연설문을 상대에게 3~5분 분량씩 끊어가며 읽어준다. 상대방이 들은 내용을 통역하면, 연설문을 읽어주었던 사람이 꼼꼼히 듣고 나서, 통역 속도는 적절했는지,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은 없었는지, 어색한 문장은 없었는지, 발음이나 발성은 괜찮았는지, 의미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지, 내용상 오류가 없었는지, 더 나은 대안은 없는지 조목조목 분석해서 평가해준다. 둘이서 이 과정을 반복해서 한국어에서 영어, 영어에서 한국어 양방향을 고루 연습한다.
두 명인 경우 스터디에 속도감이 있다는 장점이 있고, 네 명인 경우 속도는 좀 늘어지지만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순차 통역의 경우 주변의 시선만 무시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라도 스터디를 할 수 있다. 동시통역의 경우 통역 부스가 있는 장소를 빌릴 수 있다면, 각자가 다른 부스에 들어가서, 순차와 같은 요령으로 한 명이 읽어주고 한 명이 통역하되, 읽어주는 사람이 읽어줌과 동시에 들으면서 평가를 하게 된다.
평가를 하다 보면 좋은 점은 넘어가고 단점만 지적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아쉬웠던 점을 지적하기 전에 어떤 점이 좋았는지 서로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경쟁이 지나쳐 스터디를 하다가 원수로 돌아서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통역사는 어느 자리에서든 칭찬보다는 비판을 듣기 쉬운 직업이다.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있으면서 영어까지 잘 하는 사람들이 별처럼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인의 퍼포먼스와 본인의 인격을 철저히 분리하는 게 무척 중요하다. 통역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 자책하다 보면 점점 통역하는 일이 고통스러워진다.
이건 비단 통역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어 발음이나 표현을 지적당하면 인격에 대한 모욕을 당한 듯이 화를 내거나 수치스러워하는 분들이 계시다. 완벽하게 잘 할 때까지는 입을 떼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렇게 해서는 영어가 늘지 않는다.
외국어를 잘 하려면 일단 뻔뻔스러워져야 한다는 말은 영어가 마음만큼 유창하게 되지 않아서 상처를 받더라도 티 내거나 겁내지 말고 다시 도전해야 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영어에 대한 비평은 비평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나의 인격이나 존재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지하면 자연스레 이루어질 일이 아닐까?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숱한 발번역 논란과 관련하여 번역사에 대한 인격모독은 자제해주십사 부탁드린다. 충분히 자책하고 있을 테니, 오로지 번역에 대한 순수한 조언이면 족하다. 근거가 명확하면 더 좋다. 다음부터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소수의 예외를 제하고 대다수의 번역사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요율로 착취당하고,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짧은 마감 기한에 휘둘리는 지를 감안할 때 오역이 그토록 적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누군가와 함께 공부하기 어려울 때는 다음의 방법을 추천한다.
3~5분 분량씩 끊어서 스스로 연설문을 녹음하거나, 유튜브 영상을 활용한다. 혼자 순차 통역을 연습할 때는 녹음한 내용이나, 유튜브 영상을 재생한 뒤 들은 내용을 통역할 때 녹음기를 켠다. 통역을 마치고, 녹음기를 재생해서 스스로 통역한 내용을 들으며 잘 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찾아본다. 혼자 동시통역을 연습할 때는 녹음기를 켜두고, 이어폰을 노트북에 연결한 뒤 영상이나 녹음 파일을 재생한다.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꽂고 한쪽 귀는 열어둔 채 통역 연습을 한다. 통역을 마치고 녹음한 내용을 들어보며 순차와 마찬가지 요령으로 잘 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찾아본다. 통역한 내용을 스크립트로 받아 적은 뒤 번역본을 감수하는 요령으로 문법과 표현을 고치면 더 꼼꼼히 스스로의 퍼포먼스를 되짚어 볼 수 있다.
법정에서 자주 쓰이는 통역 방법으로 눈으로 문서를 읽으면서 입으로 통역하는 시역(sight transl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직독직해나 문장 구역이라고도 부른다. 최근에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Call Me By Your Name에 정전된 밤 엄마가 엘리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독일어로 된 동화를 영어로 통역하면서 읽어주는 장면이 있다. 이 역시 일종의 시역에 해당한다.
이런 요령으로 뉴스 기사, 연설문, 관련 자료를 읽을 때 눈으로는 한국어로 읽으면서 입으로는 영어로 말하며 통역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전에 올렸던 글에서 주제가 같은 국문 기사와 영문 기사를 한 벌로 놓고 비교하며 공부하면 효과적이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이 방법은 문장 구역에도 유효하다. 국문 기사를 영어로 통역하며 표현하기 난감했던 부분에 대한 힌트를 영문 기사에서 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