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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Sep 06. 2018

무례한 사람의 무리한 부탁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왜 말을 못 해!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버스에 앉은 사람들은 남의 짐을 당연한 듯 자기 무릎에 올렸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의 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지 안다. 거절당하는 것이 무안하기 때문이다. 도와주겠다고 할 때 단호히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거절하는 입장에서는 남에게 신세를 지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럽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것이 마음 편하다. 세상은 남에게 폐를 끼치고 또 그 폐 끼침을 갚는 것으로 굴러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잊었다.

한수희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폐를 끼치기 싫은 마음이 손해 보기 싫은 마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곤란한 부탁을 받았을 때 제대로 거절을 하지 못해서 낭패를 본 일이 더러 있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부담감을 지우는 게 싫어서 되도록 부탁할 거리를 만들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받았던 예기치 않은 도움으로 무사했던 경험이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선의로 누군가를 도왔던 경험이 있다. 그때 그 사람에게 바로 그 순간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받은 만큼을 다른 사람에게 갚으며 살아간다.


그런 이치를 직접 깨닫게 된 사건이 있었다.


전 직장에서 현 직장으로 이직하는 사이 한 달간의 공백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원룸 독채를 빌려 호주 멜버른에 머물렀다. 여행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향하면서 스타벅스에 들렀다. 줄을 서는데 어느 일본분이 불쑥 내게 무료 음료 쿠폰을 내밀었다. 텀블러를 사면서 받은 쿠폰인데 지금 출국하면 언제 다시 한국에 올지 모르니 어차피 쓰지 못할 것이라 아까워서 주는 것이라 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떠맡기다시피 쿠폰을 안기고 그는 표표히 제 길을 갔다. 평생 경품이라곤 당첨되어 본 적 없는 보통의 운세에 이런 일도 다 있나 싶어 신기했다. 무려 사이즈나 음료 종류의 제한이 없는 스타벅스계의 백지수표, 텀블러 음료 무료 쿠폰이었다.


내 앞에는 외국분이 서계셨는데 주문에 한참 시간이 걸렸다. 가만히 듣자니 매장에서 어떤 우유를 취급하느냐 묻는 것이었는데, 주문받으시는 분 표정이 대략 난감했다. 보다 못해 중재에 나섰다. 사정을 물으니 종교적 이유로 소에서 짠 우유 외에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매장에 염소나 다른 동물에서 짠 우유가 있는지 물었다. 콩에서 난 식물성 우유는 있지만 젖소 외에 다른 동물에서 난 우유는 없다는 설명을 전달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것으로 쿠폰 값을 한 것이구나. 그 묘한 이치에 웃음이 났다.      


여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내가 잘하는 일로 누군가를 곤궁에서 구해내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껴본 셈이다. 그러나 도를 넘는 무리한 부탁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오촌에 해당하는 내재당고모가 불쑥 전화를 걸어 "우리 아들과 매일 하루 30분씩 영어로 전화 통화를 해달라"고 부탁할 때, "그게 힘들면 하루 15분씩 일주일에 세 번만 해달라"고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 협상을 걸 때, 끝내 시원스러운 대답이 나오지를 않자, “너는 나한테 그 정도는 해도 돼” 숫제 맡겨둔 빚 받는 사람처럼 독촉할 때 몹시 기분이 찝찝해진다. ‘고모, 나는 걔랑 둘이 마주 앉아서 한국어로도 삼십 분을 대화해 본 적이 없어.’ 속으로만 대꾸한다.     


직장에서 오며 가며 얼굴 정도 본 사람이 불쑥 논문을 감수해달라고 부탁했다. 업무상 필요한 일이면 우선 과장님께 허락을 구하는 게 순서인 듯해서 쓰임을 물으니 답을 피한다. 그 모양새를 보니 개인적인 부탁임에 틀림없는데, 이번 주 금요일까지 해주시면 좋다며 기한까지 정한다. 본인이 봐도 번역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 한 번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굳이 내용을 고칠 필요는 없고, 어느 부분이 이상하다고 말씀만 드리면 된다는 뜻이죠?” 하니 그건 아니고, 이상한 게 있으면 옆에다 살짝 고쳐주면 좋단다. 도대체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니 3장쯤 된다고 한다. 기가 막혀하는 것이 티가 났는지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묻는다. 직전까지 바쁘게 타자를 치던 내 손과 어지러운 책상 위를 보더니, 업무 바쁘시면 우선 급한 것부터 끝내고 해주셔도 된다며 다음 주에 드리겠다고 홀로 협상 단계로 넘어간다. 제대로 거절도 허락도 못한 상태였는데, 그분이 뜬 자리에 캔커피만 남아 있다.


지금 쥐고 있는 업무가 몇 개인데, 바빠 죽겠는데, 개인적인 부탁이면, 업체에 맡기거나 요율대로 비용을 지급해야지. 거절할 틈도 없이 자리에 밀어 넣고 간 캔커피를 보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아, 커피는 죄가 없지. 사람이 밉다.


정문정 작가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도 읽었는데. 읽으면 뭐하나, 응용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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