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허무하고 아름다운
오직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소설도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김희성이 좋아한다던 “아름답고 무용한 것”에 이만큼 걸맞는 소설이 또 있을까. 책을 펴는 순간부터 당신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만나게 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밀도 높은 첫 문장을 대면하는 순간 당신의 속도는 설국의 시간으로 수렴한다. 시처럼 아껴 읽느라 느리게 읽게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길고 어두운 터널 너머 표층에 하얀 설원을 두른 밤의 풍경이 펼쳐질 때 제약되어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확장되면서 화자가 느낄 시각적 충격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가끔 서양무용에 관한 글을 쓰는 시마무라가 1년에 한 번 정도 눈 지방으로 여행을 한다. 해마다 같은 여관에 투숙하며 온천욕을 하고, 이따금 충동적으로 산에 오른다. 시마무라는 두 여인에게 끌린다. 여행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돌려받지 못할 열정인 줄 알면서도 온 존재를 부딪혀오는 게이샤 고마코. 간호원이 꿈이었으나 비틀린 애정을 품은 채 단 한 사람만을 간호할 수밖에 없던 요코. “헛수고일수록 오히려 순수”하다 여기는 시마무라답게, 내핵이 차가운 허망한 열정에 이끌린다. 서사보다는 서정에 기댄 작품이므로 오감을 열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눈 지방의 자연은 쓸쓸하고 허무한 겨울의 정서를 직조한다.
이 허위의 마비에는 파렴치한 위험이 풍겨나와 시마무라는 지그시 이를 음미하며 안마사가 돌아간 뒤에도 계속 누워 있었는데, 가슴 밑바닥까지 오한이 드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문이 활짝 열린 채였다. 산골짜기엔 일찍 응달이 지고, 어느새 차가운 해거름이 내려와 있었다. 어두컴컴하여 아직 서쪽 해가 눈 위에 비치는 먼산들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심리 묘사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우아하게 그려낸 필치는 압도적으로 겨울에 어울린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늘에는 쏟아질 듯 은하수가 밝게 빛나는데 땅에서는 불길이 고치 창고를 살라먹는다. 두 여인은 불길 속에 있는데, 시마무라의 안으로는 은하수가 흘러든다. 시마무라가 관조자임을 이처럼 소름끼치게 드러낸 장면이 또 있을까.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조하는 본인만은 아주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에, 이토록 적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닐지. 그런 허무라면, 허무가 사치라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