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mi Sep 26. 2018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이토록 허무하고 아름다운

오직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소설도 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김희성이 좋아한다던 “아름답고 무용한 것”에 이만큼 걸맞는 소설이 또 있을까. 책을 펴는 순간부터 당신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만나게 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밀도 높은 첫 문장을 대면하는 순간 당신의 속도는 설국의 시간으로 수렴한다. 시처럼 아껴 읽느라 느리게 읽게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길고 어두운 터널 너머 표층에 하얀 설원을 두른 밤의 풍경이 펼쳐질 때 제약되어 있던 공간이 순식간에 확장되면서 화자가 느낄 시각적 충격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가끔 서양무용에 관한 글을 쓰는 시마무라가 1년에 한 번 정도 눈 지방으로 여행을 한다. 해마다 같은 여관에 투숙하며 온천욕을 하고, 이따금 충동적으로 산에 오른다. 시마무라는 두 여인에게 끌린다. 여행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돌려받지 못할 열정인 줄 알면서도 온 존재를 부딪혀오는 게이샤 고마코. 간호원이 꿈이었으나 비틀린 애정을 품은 채 단 한 사람만을 간호할 수밖에 없던 요코. “헛수고일수록 오히려 순수”하다 여기는 시마무라답게, 내핵이 차가운 허망한 열정에 이끌린다. 서사보다는 서정에 기댄 작품이므로 오감을 열어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지방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차가워질 무렵, 쌀쌀하고 찌푸린 날이 계속된다. 눈 내릴 징조이다. 멀고 가까운 높은 산들이 하얗게 변한다. 이를 <산돌림>이라 한다. 또 바다가 있는 곳은 바다가 울리고, 산 깊은 곳은 산이 울린다. 먼 천둥 같다. 이를 <몸울림>이라 한다. 산돌림을 보고 몸울림을 들으면서 눈이 가까웠음을 안다.


눈 지방의 자연은 쓸쓸하고 허무한 겨울의 정서를 직조한다.


이 허위의 마비에는 파렴치한 위험이 풍겨나와 시마무라는 지그시 이를 음미하며 안마사가 돌아간 뒤에도 계속 누워 있었는데, 가슴 밑바닥까지 오한이 드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문이 활짝 열린 채였다. 산골짜기엔 일찍 응달이 지고, 어느새 차가운 해거름이 내려와 있었다. 어두컴컴하여 아직 서쪽 해가 눈 위에 비치는 먼산들이 성큼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미묘하고 아슬아슬한 심리 묘사와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을 우아하게 그려낸 필치는 압도적으로 겨울에 어울린다.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늘에는 쏟아질 듯 은하수가 밝게 빛나는데 땅에서는 불길이 고치 창고를 살라먹는다. 두 여인은 불길 속에 있는데, 시마무라의 안으로는 은하수가 흘러든다. 시마무라가 관조자임을 이처럼 소름끼치게 드러낸 장면이 또 있을까.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조하는 본인만은 아주 안전한 곳에 있기 때문에, 이토록 적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닐지. 그런 허무라면, 허무가 사치라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