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 손발이 오그라들고 온 몸에 닭살이 돋지만 멋있어
어린 시절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영화 속 정우성이 되고 싶어 그가 나온 영화 포스터를 방에 붙여두고 멋져지길 고대했다. 물론 그런다고 멋져지지 않는다. 타고나야 한다. 타고나지 못하면 이토록 세월이 흘러도 달라질 것이 없다.
지금까지 잘생기지 않은 얼굴로도 부족함 없이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지만 잘생기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일이다. 그저 자기만족일지도 모르겠고, 그나마 자기 '만족'이면 다행이다. 자기 '위안'이면 서러운 일이 된다.
잘 생긴 남자가 둘이나 나오길래 부러운 마음으로 봤다. 장국영, 유덕화. 그리고 짧게나마 등장한 양조위까지. 선생님들은 좋겠습니다.
우연히 본 영화에서 뜻밖의 장면을 보게 되었다. 여러 미디어를 통해 보아 왔던 장국영이 속옷 차림으로 '맘보춤'을 추는 영상이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 있었구나. 남들 다 볼 때 뭐하다 이제야 이렇게 보게 되었지만 뜻밖이어서 더 반가웠다.
사실 전후 맥락을 모르고 봤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열광했어야 할 장면이었는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물론 잘생긴 배우의 춤이라 눈에 띄는 건 알겠지만 그럼에도 모두에게 화자 되고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낼 정도로 매력적이었던 걸까?
하지만 괜한 의구심은 영화를 보니 이해가 되었다. 영화 속 아비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느끼고 그의 끝간데 없는 자신감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 장면'이 달리 보였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흔한 '러닝셔츠' 한 장 걸치고 아무렇게나 리듬을 탈 수 있겠냐는 말이다. 설령 혼자 집에 있다 하더라도 극장에는 수많은 관객들이 보고 있는데 말이다.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눈빛, 치명적인 '척'이 아니라 정말 치명적일 것 같은 분위기의 아비는 허세스럽게 행동하지만 정작 본인은 진심이다. 세상 모든 걱정과 고뇌를 짊어진 듯한 아비는 우수에 젖은 눈빛과 뜬금없는 멘트로 여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남자 대체 뭐지?
더구나 그때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감성으로는 좀처럼 견디기 힘든,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들이 나와 힘들었지만 그마저도 장국영이 하니 봐줄만했다.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볼 일이다.
친모에게 버림받은 아비는 그 상처 때문인지 여자들과의 깊은 관계를 거부한다.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랑꾼으로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는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나쁜 남자'의 면모를 과시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매력을 뿜어낸다.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다. 잘생겼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아무렇게나 소비할 수 있다니, 부럽다. 만약 아비가 못생겼다면 어땠을까? 어디서 성질머리야!라는 말 정도는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들어봤다는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오래된 영화의 낯선 분위기에 흠뻑 빠져 본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건 호흡이다. 조급함 없이 천천히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의 호흡이 지금의 것들과는 달라 생경하게 느껴졌다. 호기심이 생겨 영화에 대한 자료들을 살펴보니 아, 왕가위 감독이었구나. 영화인이 되고자 했던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여러 전작들을 본 것 같은데 이제는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 <중경삼림> 정도만 희미하게 기억나니, 세월 앞에 다 부질없는 과거가 되었다.
어쨌든 영화에 취해 나 역시 나른해졌고 왠지 장국영처럼 반항심 가득한 눈빛으로 비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아 맞다 난 장국영이 아니지. 이 얼굴로는 올바르게만 살아도 험난한 세상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영화와 관련된 자료를 조금 더 찾아보니 원래는 양조위를 중심으로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은 한 때는 그럴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속편을 만들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아쉬울 따름이다. 속편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장국영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도 아쉽고 내 얼굴도 아쉽다. 온통 아쉬운, 아비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 왕가위 감독의 작품들을 다시 찾아볼 생각이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할 일도 많지만 그래도 그냥 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