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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Dec 01. 2021

WHO AM I?

내 카카오톡 친구 목록 중에는 독특한 이름이 하나 있다. 복제인간. 우연히 그 이름을 본 친구가 묻는다. 복제인간이 누구야? 하지만 2초의 생각 끝에 친구는 그 이름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박장대소한다. 그렇다. 내게는 복제인간이 있다.


복제인간에 대해 글을 쓰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대학교 1학년 때였을거다. 어느 날 친구가 내게 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하는 대국민 여행 프로젝트 응모 공지문을 소개했다. 이번 여행에 맞는 주제의 글을 써라, 당첨될 경우 공짜로 2박 3일 동안의 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는 내용의 공지문이었다. 그 해 한국관광공사에서 주최한 여행의 주제는 ‘쌍둥이’였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똑같이 생긴 사람 한 명이 더 있으면 무슨 기분이냐고. 그럼 나도 그들에게 되묻는다.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없는 건 무슨 기분이냐고. 초등학교 시절, 내 별명은 1+1이었다. 어릴 때 엄마는 우리에게 똑같은 옷을 입혀주곤 했다. 내가 줄무늬 옷을 입으면 동생도 줄무늬 옷을 입었고, 파란색 옷을 입으면 동생도 파란색 옷을 입었다. 사실 그게 싫진 않았다. 반 아이들에게 놀림받기 전 까지는.

도플갱어는 서로 보면 죽는다던데.

사실 지금은 그냥 웃으면서 받아칠 수 있는 말이지만, 어린 맘에는 죽는다는 소리를 듣는 게 괜히 분했다. 복제인간 얘기도 이때 나왔다. 누가 원본이고 누가 복제판인지 날 두고 친구들끼리 대화가 오갔다. 처음엔 웃으며 넘겼지만, 어떤 날에는 분해서 친구들과 싸우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괜스레 동생과 떨어져 있었다. 동생과 무슨 다툼이 있던 것도 아닌데. 초등학교 2학년까지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어느 날 엄마에게 부탁을 했다.

엄마. 3학년 때부터 저희 다른 반 하게 해 주세요.


그때부터였다. 같은 취미와 개성을 공유하고 있던 우리는 그날부로 개별적인 정체성을 형성해가기 시작했다. 같이 지내는 친구들의 무리가 처음으로 달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점점 날 독립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1+1이라는 꼬리표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 난 어릴 적부터 쌍둥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그게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되어서 싫었을 뿐, 쌍둥이는 어떻게 보면 내 등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든든한 존재였다. 나랑 비슷한 너라서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끈끈한 믿음이 탯줄부터 이어져 있었기에, 어쩌면 동생과 나는 평생 친구나 다름없었다. 내 삶에서 이것만큼 운명적인 관계가 있을까, 은연중에 생각하곤 했다. 동생은 내 밑바닥 생각을 이해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였으며, 서로의 그늘조차도 비슷했다. 그래서 우리는 진심을 담은 공감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가끔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쌍둥이는 같은 꿈을 꾸는지, 텔레파시가 통하는지, 한 명이 아프면 같이 아픈지. 내가 해주고 싶은 대답은 의외로 ‘그렇다’이다. 어릴 적 우리는 대체로 비슷한 꿈을 꾸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욕구를 알 수 있었으며 한 명이 아플 땐 다른 한 명도 같이 아팠다. 이건 무슨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건 우리가 비슷한 환경과 생활 루틴을 공유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특히 어릴 때 쌍둥이는 주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음식을 먹기에.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누군가 저런 질문을 한다면 이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쌍둥이는 똑같지 않다. 난 알다시피 글을 좋아하지만 동생은 그림을 좋아한다. 어릴 때 교회에서 주최한 그림 대회에서 동생이 대상을 탄 적이 있다. 꽤 규모가 큰 교회였는데, 이 소식을 들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셨다. ‘우리 손자가 그림대회에서 대상을 탔지 뭐니!’가 아니라 ‘뭐, 우리 손자가 그림대회에서 대상을 탔다드라?’ 이런 느낌으로. 질투가 났던 난 이 정도는 발로도 그릴 수 있겠다고 동생을 도발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동생이 대상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심사위원의 의도를 명확히 파악한 덕분이 아닐까 싶다. 역시 내 동생 똑똑하다. 동생은 디자인 관련 전공을 하고 있는데, 요즘도 종종 굵직한 대회에 나가 수상하곤 한다.

우리집 파피루스


어릴 적 우리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가방을 메고 다녔지만, 동생은 자동차를 좋아했고 난 로봇을 좋아했다. 동생 책상에는 유명 미니 슈퍼카와 핫 휠 장난감 자동차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내 책상에는 ‘휴보’를 제작한 오준호 박사님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집필하신 책이 올려져 있었다. 동생이 엔초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무르시엘라고를 좋아했다면, 난 휴보와 아시모를 좋아했다.


동생은 진작 전역하고 휴학 때 인턴 생활을 해서 현재 대학교 졸업반이고, 나는 대학을 이미 졸업하고 지금 군대에 와 있다. 어릴 때 생김새가 비슷해서 분간도 가지 않았던 우리는 이제 외양과 스타일도 많이 달라졌을 정도로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함께 지내지 못한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생김새에도 뚜렷한 차이가 생겼다. 물론 우릴 처음 본 사람들은 쉬이 분간하지 못하긴 하지만. 한때 같은 음악을 듣던 우리는 이제 음악 취향도 꽤 바뀌었다. 동생은 힙합을 즐겨 듣고 난 밴드 음악을 좋아한다. 우리는 거울을 보듯 비슷하지만 어떤 면에선 꽤나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 스스로를 대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동생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내 이름을 싫어하곤 했다. 내 이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오직 동생과 함께할 때만 의미가 있었다. 나랑 동생은 호랑이 띠다. 할아버지는 호랑이를 의미하는 한자인 虎(범 호)의 뜻을 내 이름의 끝에, 음을 동생 이름의 끝에 붙이셨다. 따라서 호랑이를 뜻하는 한자는 동생이 가져갔고 내게는 그저 음을 맞추기 위한,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한자 範(법 범)이 주어졌다. 내가 홀로 존재하는 한 내 이름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이미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었고 빛이 나고 있었다. 반면에 난 그러지 못했다. 가끔 빛나지 못해서 버티기 어려울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난 정말 1+1일지도 모른다고. 도전 앞에서 남들이 으레 하듯 내 이름 석 자를 걸 용기가 없었다. 나는 내 이름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했다. 그저 악으로 깡으로 버텨올 뿐이었다.


내가 날 좋아하진 못해도, 동생은 좋아했다. 동생과 있을 땐 항상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동생의 존재가 내 이름의 의미를 완성시켜주는 것처럼. 한국관광공사 대국민 여행 프로젝트 응모 기간에 어떤 글을 쓸지 고민했다. 동생과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어릴 때 함께 공룡 놀이를 하던 추억. 서서히 개인의 자아를 형성해가면서 서로 다른 취미와 친구들을 만들어 가던 추억. 그렇게 성장하는 동생을 보며 나의 성장을 반추하던 시절들.


꿈을 무시하는 어른들의 질타에 아랑곳하지 않고, 힘든 티 안 내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던 동생. 어른들의 편견에 맞서 스스로를 결과로 증명해 보이던 동생. 1분 30초 먼저 세상 밖으로 나와 어쩌다 장남이 된 내가 친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것을 억울해하면서도, 내가 불편해할까 봐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유머로 승화하던 동생.


만일 우리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절대 널 먼저 보내지 않겠다는 내용의 글을 적었다. 내가 동생에게 전해줄 수 있는 작은 진심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전국 단위에서 모집하는 7쌍의 쌍둥이 중 한 쌍으로 뽑혀 여행을 다녀왔다.


이제 우리는 같은 옷을 입지 않고, 같은 신발을 신지 않으며,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공간에 있지도 않고 인간관계 망도 완전히 상이하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1+1이 아니다. 그러기엔 각자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삶이 질릴 때마다 다시 활력을 되찾기 위한 방법들도 꽤나 달라졌다. 둘 다 보금자리에서 나와 멀리 걸어왔다. 얼굴 못 보고 산지도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난 느낄 수 있다. 우리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탯줄을. 집 밖으로 나와 보니 알 수 있더라. 날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난 더 이상 내 이름에 부질없는 의미부여를 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것들이 날 보호해주거나 강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창과 방패는 내가 직접 만드는 것이다. 주어진 것들은 때로 날 게으르게 하는 환각이 될 수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 중 당연한 것들은 없다. 이 세상에 그저 성공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가난한 토양에서 나온 자는 빈곤을 이겨내야 할 끈기가 필요하고, 부유한 토양에서 나온 자는 그동안 기르지 못한 본능의 근력을 길러야 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건 의지의 문제이자 마음가짐의 문제이다. 성공 앞에서 누구도 쉬운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아직 많은 걸 경험한 나이는 아니지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 믿음으로 요즘을 살아가는 중이다.


아무런 응원을 주지 않은 내 이름에게 그래서 감사하다. 덕분에 내게 부족한 모든 것들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근거 없는 후광을 없애고 빈 그릇 바닥부터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태도를 지닐 수 있었다. 난 지금도 믿을 수 있다. 이 태도가 날 강하게 만들어주리란 것을. 마치 탯줄로 이어진 운명이 언제나 내 등을 지켜줄 거란 믿음처럼. 아직도 널 생각하면 타인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느끼니까. 그 생각만으로도 난 기적이라고 느끼니까.





고마워. 네 말대로 늦게 나온 녀석이 뱃속에서는 형이었을 테니, 앞으로 종종 너가 형 할 기회를 줄게.


근데 동생도 나쁘진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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