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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Dec 06. 2021

내 글친구에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인생엔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아.


여러 부류의 아이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기엔 내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지 않았어. 아니, 어쩌면 스펙트럼이 너무 넓었을지도 몰라. 당시 내 또래 아이들은 오로지 게임과 SNS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까. 학교에 있을 땐 추억을 연료 삼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지만 하교할 때면 아이들은 정말, 365일 PC방에 갔지. 그렇게 게임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서서히 학교에서도 게임 얘기만 하고 다녔어. 나도 같이 어울리고자 PC방에 몇 번 다녀봤는데 뭐랄까, 시간을 버리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나랑은 잘 맞지 않더라고. 겉으로는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곤 했지만, 뭔가 속마음을 공유할 친구는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난 그게 종종 그리웠나 봐.


그래서 유독 눈길이 갔어. 책 읽는 아이들이. 똑같이 느껴지는 친구들 속에서 유독 그런 애들은 뭔가 다를 것 같았거든. 나랑 비슷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거든. 책을 좋아하곤 했어. 독서에 취미를 붙이지 않던 시기에도. 제대로 읽을 줄도 몰랐으면서. 제대로 적을 줄도 몰랐으면서. 그냥 종이의 냄새나 단정한 표지들이 보기 좋았어. <책 먹는 여우>라는 동화책이 있는데 약간 그 여우랑 비슷하게 책을 좋아했던 것 같아. 동화 속 여우는 책에 소금이랑 후추를 뿌려 스테이크마냥 썰어 먹는데, 동화책에 그려진 삽화를 보면서 나도 입맛을 다셨거든.


내가 볼 때 이건 부모님의 영향이 커. 우선 아빠는 책을 집필하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고, 엄마는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주 독서를 하시곤 했어. 근데 재밌는 건, 엄마의 그런 액션은 자식들이 독서에 취미를 붙였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건데 그게 당시에는 우리에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엄마를 독서의 화신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거야. 그때 시작된 엄마의 열정은 지금도 진행 중이야. 가끔 엄마한테 전화해서 뭐 하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셔. 내가 뭘 하겠냐며, 그 말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책 제목들을 나열하면서. 어릴 땐 내가 아빠랑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엄마랑 많이 닮았다는 걸 느껴. 엄마랑 난 요즘 서로의 독서 파트너거든.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표현하기 힘든 믿음과 신뢰가 내게는 있어. 옛날엔 막연히 느꼈었는데, 요즘 글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점점 그 이유가 명확해지는 것 같아. 바로, 글을 읽거나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거야.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더 나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더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워하는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타인의 생각을 배우기 위해. ‘나’를 표현하고 사랑하기 위해. 그렇더라. 글을 좋아하는 이유에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없더라고.


욕을 얻어먹은 어느 날이었어. 사회는 악의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욕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이었어. 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라며, 더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거라며, 그렇게 자신들의 부서진 양심을 위로하면서 내 존재를 부정하는 그런 사람들. 자신들도 언젠가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 세상에는 얼마나 그런 사람들이 많을까. 그들 앞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어둠에 고마움을 느끼며 집에 온 그날, 너의 글을 찾아 읽었어. 그저 잠시 흐린 하늘 아래 있을 뿐이라는 내용의 글을. 비록 두 눈으로 당장 볼 수는 없어도, 흐린 하늘 위 태양은 언제나 밝게 빛난다는 내용의 글을. 난 그날 마음에 꽃을 심고 잘 수 있었어. 그리고 나도 다음날 피곤하지 않은 하루를 보낼 수 있었어.


내가 글을 쓰는 플랫폼인 브런치에는 글을 좋아하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더라. 그동안 내 주변에 글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무했던 것을 보상해주려는 것처럼. 독자들에게 이런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니. 어둠을 밝히는 그들의 빛을 무척이나 좋아했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매일 얼굴 보고 사는 사람들보다 더 소중히 느껴지곤 했어. 그런데 날 슬프게 했던 사실은, 글 쓰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작지 않은 아픔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그렇게 빛나는 마음속에 그런 아픔들이 있을 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어. 나쁜 사람들도 잘 살고 있는데 왜 좋은 사람들이 아파야 하는 걸까. 어쩌면 세상이 문제일지도 몰라.


언젠가 너에게 메일로 글을 썼지. 너의 글을 읽고 힘을 얻은 만큼, 너에게 힘을 주고 싶어서 글을 썼어. 그런데 갑자기 내 글이 부끄러워지더라. 언어와 문장이 무언가를 정의 내리고 규정짓는 속성이 강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내가 너의 고통을 재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치 내가 네 고통을 안다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은 본래 누군가가 손금 보듯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닌데 말야. 그게 부끄럽고 미안한 거야. 그래서 답장을 못했어. 답장하고 싶었거든.


맞아. 글 쓰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아픈 사람들이기도 한 것 같아. 우린 모험을 하는 사람들이야. 잃어버린 마음의 퍼즐을 찾아 헤매는. 그 퍼즐은 미워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기 위한 방법. 꿈처럼 살기 위해 상실된 동기를 되찾을 방법.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영원의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방법. 내면의 혼란을 다잡고 평온을 얻기 위한 방법.


최근에 글을 쓰는 마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도 뭔가를 찾고 있었던 것 같아. 뭘 찾고 있었던 건지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나마 쉽게 표현하자면 마음 한구석에 뚫린 구멍을 채우기 위한 조각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아. 어쩌면 내가 아픈 사람일지도.


그래도 아프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은 자긍심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깨어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하고 고민할 줄 안다는 의미일 테니까. 요즘 시대에 감각을 열어놓고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우리가 보는 세상에는 ‘멀리 또 넓게 보지 말라’는 다분한 의도가 도사리는 것만 같고, 멈출 줄 모르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수많은 연결을 단절시키고 개개인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이지만, 요즘은 문득 너가 잘 지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확신하는 건 아니야. 단지 요즘 너의 새 글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왠지 네가 아프지 않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추측하는 것뿐이야. 너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진 모르겠지만, 언제나 잘 지내길 바라. 좋은 사람이 아픈 건 슬프잖아. 너의 새로운 글을 보지 못해서 조금은 아쉽지만, 만약 편안한 일상을 보내는 거라면 그걸로 좋을 것 같아.


종종 너의 글을 찾아 읽고는 해. 난 지금도 너의 문장에서 힘을 얻거든. 넌 알고 있을까. 너의 문장이 얼마나 생명력이 있는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너의 문장이 얼마나 내게 힘을 주는지. 그런 에너지를 품은 너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하는지. 너의 글을 읽게 해 줘서 고마워. 내 글친구가 되어 줘서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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