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통해 본 <최애의 아이> 아이의 사랑
여러분에게는 ‘최애(崔愛)’가 있나요? 저는 최근에 최애가 생겨버린 것 같아요. 저의 최애로 자리매김한 그녀는 바로 아이돌 그룹 B코마치B小町의 센터 호시노 아이星野アイ입니다! 그게 누구냐고요? 모르시는 것도 당연해요. 사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거든요. 아이는 최근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1기 방영을 마친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에 등장하는 주인공입니다. 작품의 설정상 아이는 말 그대로 ‘완벽한 아이돌’이에요. 그야말로 아이돌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완벽한 외모에 춤과 노래는 물론이고 몸짓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중을 사로잡아요. 타고난 탤런트에서 오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 역시 아이의 매력 포인트이죠. <최애의 아이>라는 작품에서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에게는 비밀이 있어요. 그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힘든 성장기를 보내며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기획사의 사장 사이토 이치고는 그가 새로 만드는 기획사를 이끌어갈 아이돌 그룹을 제작하며, 그녀에게 아이돌이 될 것을 권유하지만 정작 아이는 나같이 사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팬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아이돌이 될 수 있냐며 거절하죠. 하지만 이치고는 아이에게 아이돌이라는 존재는 존재만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아이돌이 귀엽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 그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가 팬들에게는 애정표현이 된다고,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 안에도 사랑한다는 가사가 수도 없이 들어있다고, 그렇게 팬들에게 항상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다 보면 언젠간 그 사랑이 진실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말합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사랑을 누구보다 알고 싶었던 아이에게 그의 말은 큰 울림을 줬어요. 아이돌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랑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죠. 언젠가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해보고 싶다는 꿈과 함께 그녀의 아이돌 생활이 시작됩니다.
아이는 아이돌이 되기 위해 사랑을 연기하고, 완벽한 연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무대에서의 웃는 표정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도 없이 거울을 보며 연구를 거듭하고 표정을 밀리미터 단위로 조정합니다. 입술의 각도, 눈웃음치는 방법과 타이밍을 비롯하여 아이의 웃음은 아이의 연습과 연출을 통해 만들어진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대와 카메라, 대중 앞에서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 역시 그러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아이의 모습에 누군가는 ‘인간미’가 없다고 비판하지만 아이는 그러한 비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돌이란 그런 ‘거짓말’을 요구받는 직업이기 때문이죠. 아이의 거짓말은 ‘프로’로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이고, 아이는 ‘프로’ 아이돌로서 자신의 숙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언젠간 그 거짓이 진실이 되는 순간을 꿈꾸면서요.
그런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들이 생겨납니다. 17살 무렵 비밀리에 출산한 쌍둥이인 아쿠아와 루비입니다. 사랑을 알고 싶은 아이는 그 자신의 연예계 생명을 걸고서라도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출산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렇게 태어난 쌍둥이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연습’합니다.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이를 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는지 아이가 무대에서 처음으로 진실 된 웃음을 보인 것은 관객석에 있는 아쿠아와 루비를 보면서였죠. 그런데 여전히 아이는 자신의 자식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소중한 그들에게는 자신이 진짜 사랑을 느낀다는 확신이 들 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나 아이는 결국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됩니다. 스포일러가 될까 하여 자세한 사건을 이야기할 수 없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아이는 아이돌 활동을 포함하여 자신이 지금껏 해온 모든 노력이 곧 더없는 사랑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쌍둥이 자식들과 함께해온 수년간의 그 모든 날을 떠올리며, 아이는 비로소 그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합니다.
루비, 아쿠아... 사랑해. 아아 드디어 말했어...(중략)...이 말만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야.
저는 이 명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까지 아이는 사랑을 하지 않아 왔던 것일까?” “아이가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과 연습은 그저 가식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어요. 아이는 그 이름이 상징하듯 ‘사랑’(사랑을 뜻하는 한자인 愛는 일본어로 ‘아이’라고 읽힌다)을 하고 있던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저는 오래전에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인물 소개: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 Erich Seligmann Fromm' (1900~ 1980)은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활동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입니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주제의 이야기를 철학자 치고는(?) 간결하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그의 책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은 에리히 프롬이 1956년에 저술한 책으로, 『소유냐 존재냐』,『자유로부터의 도피』 등과 함께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으로 꼽혀요. 특히 『사랑의 기술』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서 여러 공교육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대중과 친숙한 책입니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에 대해 다루고 있죠. 지금은 ‘연애하는 법’이나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와 같은 철학적인 주제에 대한 글이나 강연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프롬이 이 책을 작성한 1950년대에는 사랑을, 그중에서도 특히나 연애를 ‘학문’으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세상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프롬은 사랑에 대한 학문적 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랑학’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프롬이 사랑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고 온 이유는 『사랑의 기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랑은 그저 느끼는 대로 행하는 일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의도적으로 배우고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기술과 같다는 것이지요. ‘Art of Loving’이라는 이 책의 원제목은 그러한 생각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어요. 프롬은 ‘Love’라는 명사 대신 ‘Loving’이라는 동명사를 사용하며 사랑이라는 행위가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강조하였고, ‘Art’를 통해 그것이 곧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프롬의 주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사랑을 도대체 왜 원하는지에 대한 그의 해석을 알아볼 필요가 있어요. 이로부터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행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 중 사랑을 원하지 않는 분이 계신가요? 독신주의, 이를 넘어 비연애를 지향하는 분들께서도 사랑(그 사랑이 어떤 형태이든)을 원하실 것이라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인생에 사랑이 전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지독한 염세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어쩌면 사랑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 보편적이지요. 사랑을 담은 문학 작품과 창작물이 시대를 막론하는 스테디셀러인 것도 그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대체 왜 그토록 사랑을 원하는지 고민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누군가는 답할 것입니다. “외로워서” 라고요. 정답입니다. 프롬은 인간이 사랑을 원하는 이유가 바로 ‘고독’에 있다고 주장했거든요.
용어 해설: '염세주의'란 세상이나 인생을 추악한 것으로 생각하는 비관적인 태도 혹은 이를 정당화하는 사상의 흐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고독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뱃속을 떠난 순간부터 개체로서의 삶을 시작하죠. 개체라는 것은 곧 혼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 속하든, 어떤 친구를 사귀든 우리는 결국 혼자입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며 당신은 다른 누구도 아니죠. 성장 과정에서 점차 부모님의 보살핌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우리가 개체라는 사실 자체에 더 큰 불안감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우리 곁에 평생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 깨닫게 되죠. 위대한 철학자이자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그러한 고독은 일종의 신경증, 즉 ‘분리불안’의 증상이라고 보았어요. 인간은 누구나 고독이라는 이름의 분리불안을 앓고 있으며, 그러한 분리불안은 인간의 내면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만들어냅니다. 프롬은 그 증상이 너무나도 심각해서 우리가 사랑이라는 묘약을 찾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용어 해설: '정신분석학'이란 19세기 말 그 유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창시한 심리학의 한 갈래입니다.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에서 비롯된 인간의 내적 욕구와 사회적 요구간 조화와 갈등을 중심으로 인간의 행동과 정신질환을 분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중요성을 ‘느낄’ 뿐 사랑에 대해 배우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과연 연애를 많이 하는 사람은 사랑을 ‘잘’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만남과 헤어짐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어쩌면 그걸 당연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무언가를 좀 더 ‘잘’ 해볼 노력을 하지 않아요. 프롬은 여기에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편견이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을 경제적인 가치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것이고, 셋째는 사랑을 설렘의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해요. 그래서 사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몰두하죠. 운동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을 잘 입고, 멋지고 예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며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잘 보일 수 있는지, 매력을 어필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유머 있는 대화법이나 처세술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랑스러워지는 법이지 사랑하는 법이 아니”라고 프롬은 이야기합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사랑을 일종의 거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와 상대방의 가치를 평가하고 비교하여, 그 값이 맞으면 마치 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듯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는 사람들이 사랑에 경제력, 외모, 권력 등의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합니다. 마치 상품처럼 말이죠. 마지막 편견은 사람들이 사랑을 첫눈에 반하는 황홀한 감정이라고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설렘은 사랑의 시작에 있어 중요하지만, 설렘만으로는 결코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콩깍지는 언젠가는 벗겨지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이 세 가지 편견으로 인해 사람들은 사랑의 실패를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독은 더욱 깊어지고, 우리는 그 고독에 신음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사랑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과거의 실패를 발판삼아 실패를 줄이고,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사랑이 고독의 치료제로서 제대로, 또 평생 작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사랑에 대해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생기셨다면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프롬은 분리불안의 치료는 분리의 반대인 ‘합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리의 불완전함을 합일을 통해 메우는 것이 분리불안 치료의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사랑 역시 근원적으로 상대와의 ‘합일’을 지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프롬은 현대인이 사랑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사이비 합일’을 하고 있으며, 혹여 사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했어요.
프롬에 따르면 현대인의 ‘사이비 합일’은 크게 세 가지의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 양상은 ‘도취’로, 술과 마약, 섹스 등에서 얻는 일시적인 황홀경에 취하는 합일의 경험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도취를 통해 경험하는 황홀경은 지극히 ‘일시적인 합일’일 뿐입니다. 이는 지속적이지 않죠. 무엇보다 사람들은 그러한 자극에 중독되어 그것에 의존하게 됩니다. 두 번째 양상은 ‘표준화’입니다. 우리는 타인들과 우리를 동일시하면서, 특정한 계급이나 공동체를 곧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합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격의 살인과도 같습니다. 이때의 합일은 나라는 개체를 융해하며 이루어내는 합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양상은 ‘창조’입니다. 인간은 창조적 활동을 통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 합니다. 인간은 사물을 창조하며 그 사물 자체, 그리고 그 사물을 만드는 재료 따위와 합일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는 ‘외부세계와의 합일’이기 때문에 인간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근원적 고독감의 치료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이비 합일’의 경험들은 사랑의 모사품에 불과하며,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인 도피입니다. 따라서 사랑만이 우리를 고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애를 하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오히려 더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들도 있지요. 이런 상황에 대해 프롬은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는 이들이 ‘정신질환적 사랑’, 즉 가짜 사랑을 하고 있기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정신질환적 사랑’이란 사랑의 가장 저급한 형태인 “공서적 합일”(Symbiotic Unity)입니다. 용어가 좀 생소하지요? 쉽게 말해 이는 두 개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독립성 없이 살아가는 형태의 합일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공생적인 관계를 넘어 기생적이며, 이에 따라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상대방에게 예속되는 관계는 정신질환적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형태의 사랑 속에서 그들은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성도착증인 마조히즘과 사디즘*은 이러한 공서적 합일에서 비롯한다고 그는 이야기해요. 그래서 “너 없이 못살아”라는 로맨틱한 말은 프롬에겐 생각보다 위험한 말일 수 있는 것이지요.
용어 해설: 마조히즘Masochism은 피학성애, 사디즘Sadism은 가학성애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상대방에게 학대당하고, 상대방을 학대하며 성적인 쾌락을 얻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러한 사이비 합일도, 가짜 사랑을 위시한 공서적 합일도 아닌 나와 상대의 ‘진정한 합일’을 의미합니다. 나와 상대방의 개채성을 인정하고, 그 개채성과 독립성을 바탕으로 서로의 존재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자 ‘성숙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성숙한 사랑’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 책의 제목을 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결국 ‘Loving’ 이란 사랑이 곧 ‘성숙한 사랑을 능동적으로 해내는 것’을, ‘Art’란 그 성숙한 사랑을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고, 마치 목수가 목재를 다루는 기술을 배우듯, 의사가 의술을 배우듯 그 사랑을 위한 기술을 갈고 닦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노력을 평생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프롬은 이에 진정한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한 네 가지 요건을 요구합니다. 그것들은 각각, ‘훈련’과 ‘인내’, ‘집중’, ‘관심’입니다.
우선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훈련은 특별한 일을 준비하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전 생애에서 이루어지는 즐거운 훈련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것이 고백 혹은 결혼과 같은 특정한 이벤트를 통해 완결되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이 서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관계의 연속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인내’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기술을 배우더라도, 급한 마음은 언제나 화를 일으킵니다. 숙련되지 않은 의사가 수술대에 오르려는 마음을 갖는 것과 같죠. 내가 아닌 타인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사랑의 훈련은 이보다 더한 인내를 요구합니다. 계속되는 갈등, 그 다툼과 화해의 과정에서 우리의 관계는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난한 ‘훈련’의 과정을 버텨내야만 하기에 ‘인내’는 사랑의 필수요건입니다.
또한, 그는 사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지루함’을 버텨낼 수 있는 집중력이 중요합니다.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사방에 산재하는 오늘날 우리는 지루함을 한순간도 참을 수 없습니다. 고독한 개인은 언제나 그러한 지루함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지루함 속에서 그는 도저히 홀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는 타인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의존과 집착은 공생적 사랑의 씨앗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루하게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하며, 상대방 역시 지루하게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혼자 있을 수 있음에도 상대방을 선택할 때에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무엇이 아닌 어떤 지루함 속에서도 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러한 집중이 상대방을 향한다면 그것은 ‘경청’이 됩니다. 그렇게 서로의 말을 들으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하게 되고, 그 집중은 친밀함을 만듭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에 대한 경청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프롬은 그것이 바로 ‘관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내면의 소리는 나의 신념의 표시입니다. 동시에 나의 부족함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즉, 프롬이 말하는 내면의 소리란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객관적인 나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프롬은 마치 어머니가 아기의 상태를 살피듯이 나를 살피는 듯한 예민한 감수성에서부터 모든 사랑의 과정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나의 사랑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는 데에서부터 모든 변화가 시작되며, 그 변화와 개선을 위해서는 부족함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프롬이 도출하고자 했던 결론은 무엇일까요? 책의 마지막 챕터인 ‘사랑을 위한 마지막 조언’에서 그는 다음 두 가지만은 꼭 지키라고 말해요. 첫째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랑의 기술을 연마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사랑의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것은 감정의 동요나 환상적인 확신들에서 벗어나서 관계를 정립해야 함을 뜻합니다. 무엇보다 프롬은 ‘자아도취’로부터 벗어날 것을 부탁하고 있어요. 모든 정신질환의 기원은 그러한 자아도취로부터 시작된다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그 어떤 변화도 이끌 수 없으며, 자신에게는 좌절을 타인에게는 폭력을 낳기도 하는 최악의 정신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해요. 그리고 그러한 자아도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객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때 객관성은 언제나 이성에 의존하고, 이성은 겸손이라는 정서적 태도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결국, 자아도취의 극복을 위해서는 객관성, 이성, 겸손의 발달이 요구되는 것이죠. 그 능력들을 발전시키며 우리는 나 자신과 상대방을 주체로서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알아보기: 자아도취가 정신질환의 근원이 된다는 생각은 정신분석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전통입니다. 프로이트 역시 ‘사유의 전능성’등의 개념을 통해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유아기의 생각이 남아 성인이 되어서 정신질환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겸손이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사랑이라는 행위는 끝없는 고단함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많은 좌절을 겪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겠지요. 그러한 좌절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 자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기에 이를 수도 있어요. 그러나 프롬은 사랑은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는 ‘믿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아무런 보상이나 보증 없이 상대에게 자신을 맡기고 상대도 나를 사랑해주리라고 맹목적으로 희망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주리라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기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 분업은 있을 수 없고, 사랑이란 이를 바탕으로 상대방과 나 자신을 신뢰하는 상호적인 노력이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결국 『사랑의 기술』은 사랑에 있어 ‘나’라는 주체의 중요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을 ‘잘’하고자 마음먹는 것도, 그러한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인내하는 것도, 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나를 사랑하고 상대를 사랑하며 상호간의 신뢰를 계속해서 쌓아가는 것도 결국 나인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이 우리에게 우연히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오직 나의 인격을 성장시키는 끝없는 노력을 통해야만 다가갈 수 있는 피 묻은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생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죠.
먼 길을 돌아 다시 아이의 사랑에 대해 고찰해봅시다. 아이는 자신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그러나 사랑하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로부터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매 순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냉철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모든 고난을 인내해 내면서 말이죠. 무엇보다 그 모든 바탕에는 아이 스스로가 아이돌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굳건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간 진실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라는 꺾이지 않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이의 愛는 분명한 사랑입니다. 그저 그것을 깨달은 것이 늦었을 뿐, 그녀는 누구보다 뜨겁게, 그리고 잘 사랑한 사람입니다. 아이가 내뱉은 사랑한다는 말에는 일말의 거짓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쿠아와 루비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그녀가 사랑하고자 노력한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 자체로 ‘진짜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랑이 연인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고독에서 한 발짝 멀어진 것입니다. 앞으로도 당신이 잘 사랑해 나갈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합일을 통해 근원적인 고독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사랑을 위해 ‘사랑의 기술’을 연마해갈 그 날들을 응원하겠습니다.
오늘의 질문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이코패스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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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애니메이션 <최애의 아이>, 아카사카 아카/요코야리 멩고 원작 (2023)
에리히 프롬, 황문수 역,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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