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주하기 힘들더라도 혹은 싫더라도,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주길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딱 5년의 시간이 지난 2019년 4월 16일이다.
2014년 4월 16일, 우리 모두는 슬픔에 휩싸여있었다. 그리고 그 슬픔의 정서는 유가족들만이 공유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에 어떠한 연대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안산에 차려진 합동분향소를 향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일부 국민들의 시각은 다소 냉소적으로 변했다.
물론, 당시의 슬픔을 기억하고 죄책감을 공유하며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정쟁화가 된 탓에 단어 자체에 피로도를 느끼는 사람도 많아졌으며 유가족들과 관련된 유언비어의 생산 및 재생산 역시 애도의 시선을 거두게 하는데 일조했다.
영화 <생일>은 손에 돌을 쥔 채 누군가를 겨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묵직하지만 차분하게 설명한다.
이제 손에 쥔 그 돌을 내려놓으라고 그들은 아직도 많이 아프다고.
상업영화의 작동원리는 간단하다.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고 흥행에 성공시켜 투자금 이상의 수익을 내는 것.
위와 같은 문법에 비추어봤을 때 세월호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서 상업영화로 만든다는 생각은 무모해 보인다. 아니, 무모하다.
이종언 감독은 분명히 예상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람도 하지 않은 채 낙인을 찍고 평가를 할 것이란 걸. 그렇다면 어떠한 동력이 감독을 움직이게 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순간 자연스레 관객에게 도달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며 위로이고 손길이다.
<생일>은 관객들에게 슬픔을 강요하지 않는다. 굳이 비교하자면 예고편에서 보여주고 있는 슬픔의 층위가 본편보다 더 두껍게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곧 <생일>이 훌륭한 영화임을 반증하는 근거가 된다. 120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사건'과 '사고'에 대한 무게중심은 낮다(이 영화에는 팽목항도, 배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간간이 들려오는 사고 뉴스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대신 높았어야 하는 그 무게중심의 다른 한 축에는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다.
감독은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위로를, 건네고 싶은 손길을 이야기에 녹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 영화는 최대한 많은 극장에서 최대한 많은 관객들이 볼 수 있는 상업영화였어야 했다.
그 색채가 짙었든 옅었든 근 몇 년간 세월호 소재 혹은 정서를 다룬 영화는 꽤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체감도가 낮은 이유는 그런 서사나 이야기가 주로 다큐멘터리나 독립영화계에서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살아남은 아이, 죄 많은 소녀, 영주 등 '물'이나 '죄책감'을 다룬 영화는 세월호 정서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힘들다).
최근에 개봉한 <악질경찰> 역시 세월호 소재를 다룬다. 그러나 영화 내에서 소재를 다루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악질경찰>에서 세월호 사고로 죽은 고등학생 소녀가 나오는 이유는 드라마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 말고는 해당 소재가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다. 영정사진에 갇혀있는 그 소녀는 그저 슬퍼야 하고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에 등장한다.
아마도 이종언 감독은 본인의 영화가 그렇게 비치는 것을 가장 경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생일>은 특별한 영화가 된다. 감독은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유가족들을 배려했는지 화면을 통해 보여준다. 실제로 유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아픔은 그들을 향한 사람들의 과도한 비난이 전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추모공원에서 유가족 부모들이 추모를 끝내고 나서 간단한 식사자리를 가질 때 순남(전도연)은 떠나간 아이들을 대하는 다른 부모들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의 또 다른 유가족 식사자리에서는 한 부모가 연락을 받지 않자 보상금을 받기로 했다는 대답이 돌아오며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기도 한다(뒤에 잠깐 지나가는 장면으로 보상금을 받게 된 경위가 암수술비 때문이라고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역시도 감독의 세심한 배려가 빛나는 장면이다).
위와 같은 장면들은 기존의 세월호를 다룬 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갈등관계를 보여준다.
사실, 무척이나 견고하게 응집되어있는 것 같은 그들 역시 집단 내에서의 의견 충돌과 갈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단순한 직선 구조 형태로 담아낼 수 없는 슬픔과 갈등의 복잡한 역학관계는 감독의 세심한 배려를 만나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종언 감독은 안산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오랜 시간 유가족들을 지켜봐 왔다. 가장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봤던 만큼 따뜻한 손길과 위로를 건네고 싶었고 그 마음은 <생일>이라는 영화로 탄생하게 되었다.
개인의 정치적인 신념 혹은 어떠한 사안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이 영화가 불편할 수도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이 영화를 정치영화라고 낙인찍고 이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 전체를 매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생일>이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길 바라며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싶다.
'무엇을' 말하는지 보지 말고 '어떻게' 말하는지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