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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lmbug May 19. 2019

<홀리 모터스>

- 영화의 예술성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

출처 - Daum 영화

영화를 읽어낸다는 것에 대해


<홀리 모터스>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조금 장황하지만 영화를 읽어낸다는 행위에 대해 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뒤이어 나올 논지들을 충분히 이해해야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찾으러 가는 수고를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수많은 예술작품들과 만난다.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예술작품들은 액자 속의 그림일 때도 있으며 스크린 안의 영화일 때도 있다. 그러나 작품을 접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예술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을 소화시키는 우리의 방식이다.


소위 말하는 어려운 영화들을 보고 나서 관객들이 첫 번째로 하는 행동은 해석이다. 영화가 던져준 추상적인 느낌들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변환해보는 것이다. 보통 이런 과정이 원활하지 않을 때, 우리가 봤던 영화는 어려운 영화가 되어버린다. 

첫 번째 단계에서 어려움에 부딪힐 때 관객들은 곧바로 두 번째 단계에 돌입한다. 두 번째 단계란 그럴듯해 보이는 정답들을 찾는 것이다. 캐릭터의 행동은 무엇을 뜻했는지, 소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지 열심히 검색해본다. 이 과정에서 본인이 알아채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하게 됐을 때 관객들은 그것을 정답으로 여기며 비로소 영화 관람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게 대부분의 관객들이 어려운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두 번째 단계에서 정답을 찾은 것일까.


모든 영화는 어느 정도의 공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많은 영화를 본 씨네필들이나 평론가들이 보통의 관객들보다 영화를 깊게 보고 해석하는데 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의 지도에 그려놓은 선들이 영화의 정답과 오답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듯하게 해석하거나 설명한 부분들이 어느 정도의 지침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의 정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난해한 영화를 만드는 많은 감독들 중 아마도 가장 유명한 감독은 데이빗 린치일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로스트 하이웨이>, <이레이저 헤드> 등은 관객들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플롯과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가 난해한 만큼 그의 영화를 해석하고자 하는 글 역시 많은데, 그런 글의 대부분은 단순하게 연출상의 테크닉을 분해하거나 플롯을 분할하는 정도의 차원에 머무른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테크닉을 분해하거나 플롯을 분할하는 논리마저도 영화 내의 설정들로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어설픈 글이 대다수이다.

왜 어렵다고 불리는 영화들엔 항상 이런 현상들이 반복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모두 저마다의 직관으로 작품을 해석하며 받아들인다. 설령 그들이 직관으로 파악하고 있는 부분들을 글이나 말로 옮기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오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보며 어떤 시점에서 무언가를 떠올렸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빗 린치는 일찍이 얘기했다. 모든 관객들은 저마다의 직감으로 본인이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깊이 영화를 읽어낸다고. 


레오 까락스가 <홀리 모터스>라는 영화를 빚어낸 방식은 데이빗 린치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같았다. 중심이 되는 핵심 이미지나 아이디어로 기틀을 세운 후 그 위에 스토리를 붙여나가는 방식이다. 물론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그 위에 플롯과 스토리를 쌓아가는 과정에는 정교한 순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홀리 모터스>는 본질적으로 감독의 머릿속에서 유영하고 있던 이미지들에서 탄생한 영화다.

이 말은 곧 관객들이 영화의 뼈대를 하나하나 뜯어가며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감상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크린 안에서 이미지나 내러티브가 정해진 프레임 밖으로 발산할 때 관객들은 불편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하나하나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가며 음미해야만 그 영화의 진정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런 식사법이 틀린 경우들도 있다.


이미지, 영화, 세상 모든 경계가 무너졌을 때


레오 까락스는 이 영화를 몇 가지 아이디어로부터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 중 가장 중심이 됐던 건 프롤로그에서 보여줬던 영화와 관객의 관계, 혹은 영화와 본인의 관계였을 것이다. 

죽어버린 영화, 죽어버린 관객, 그 뒤에 허망한 감독. 13년 만에 만드는 장편은 그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 까락스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자 했을까.  


<홀리 모터스>는 감독인 레오 까락스로부터 출발한다. 침대 위 잠에서 깬 그는 창 밖을 둘러본 후 숲의 형상을 하고 있는 벽에서 숨겨진 비밀의 문을 찾는다. 이후 열쇠로 변한 손가락으로 문을 열고 방을 나서는데, 그가 마주하게 되는 공간은 관객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2층 관객석이다. 아래에는 죽었는지 잠들었는지 모를 관객들이 앉아있고 그 옆 통로에는 아기, 개 등이 지나간다.


레오 까락스는 영화 내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그에게 이미지란 영화 내의 한 쇼트에 한정된 사진이나 그림 따위가 아니다. 이미지는 곧 영화이며, 이런 생각은 동(動)의 이미지와 부동(不動)의 이미지의 대조로 나타난다.

영화 내에 생동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이미지들은 매력적이며,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반대로 멈춰있는 이미지들은 죽음, 소멸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나타내며 관객들을 밀어낸다.

출처 - Daum 영화

<홀리 모터스>는 오스카(드니 라방)라는 이름의 사내가 다양한 역할로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오스카는 영화 내에서 총 9개의 역할을 수행한다(하지만 영화를 어디까지 읽어내는 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오스카의 역할극 속에서 구걸하는 할머니는 인생과 죽음을 논하기도 하며, 모션 캡처 배우는 영화라는 매체를 인생이라는 범위까지 확장시키기도 한다. 또한 조카와 서로 사랑하는 삼촌을 연기한 오스카는 조카 역할을 맡은 상대배우와 '진짜' 신분을 확인하며 교감하기도 한다.


이렇게 오스카가 연기하는 9개의 역할놀이는 무작위로 섞여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아무 의미 없는 행동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질서와 논리가 없어 보이는 하나하나의 가면놀이들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생각들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레오 까락스는 영화는 무엇인지, 인생은 어떤 것인지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시각적인 충격 때문인지 몰라도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게 남는 건 광인 역할을 한 오스카이다. 사실 드니 라방이 연기한 광인은 일찍이 데뷔했던 캐릭터다. 레오 까락스, 봉준호, 미셸 공드리 감독이 함께 연출했던 <도쿄!>에서 이미 모습을 비춘 바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은 무대가 도쿄에서 파리로 옮겨왔다는 점이다.


광인은 어느 공동묘지의 맨홀 뚜껑에서 화려한 핀 조명을 받으며 지상으로 나온다. 프레임 내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흉측해 보이는 광인은 프레임 내의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꽃을 뜯어먹으며 한 모델의 촬영 장소로 이동한다. 


오스카의 3번째 역할인 광인은 영화와 인생에 대해 많은 바를 시사한다. 사람들이 죽고 안장되는 공동묘지에서 화려한 황금색 옷을 입고 고혹적인 포즈를 취하는 모델. 그런 모델을 찍으며 아름답다는 말을 연신 거듭하는 사진사. 이는 감독의 시선에서 현대의 예술이 죽어있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그 예술은 한낱 허상에 불과한 것을 쫓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보여줬던 레오 까락스 감독이 요즘의 관객에게, 영화에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광인을 보고 어글리라는 말을 거듭하며 카메라에 담고 싶어 하는 카메라맨은 현대 예술의 모순을 보여준다.


광인은 촬영 스태프의 손가락을 뜯어먹은 후 모델인 여자를 납치해 어느 지하동굴로 데려간다.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징그러워하던 광인에게 모델은 단 한 번도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심지어 지하동굴로 납치되어 끌려올 때마저 두려움 없는 덤덤한 상태로 들어온다. 

관객들은 광인이 모델에게 성적으로 혹은 가학적으로 폭력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는 옷을 찢어 노출이 심했던 여자 모델을 감싸준다. 이 장면은 사람들의 눈요기거리에 그쳤던 모델을 신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광인은 나쁜 사람일까 좋은 사람일까. 강렬했던 지상의 이미지와 다소 누그러워진 지하의 이미지는 상충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델과 광인의 구도는 관객들로 하여금 종교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감독은 이에 대해 말을 아꼈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식으로 비치길 원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출처 - IMDb

뛰어난 각자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홀리 모터스>를 대표할 수 있는 에피소드는 테오(드니 라방)를 죽이는 오스카의 이야기다. 

오스카는 지하 창고에서 일하는 테오를 죽인다. 특별할 바 없어 보이는 이 역할극에서 중요한 설정은 오스카와 테오가 같은 생김새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리무진 안의 모습들을 통해 오스카가 누군가에게 임무를 받고 수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역할놀이가 펼쳐지는 세계가 현실인지 가상인지 확언할 수 없다.


죽어가는 삼촌 역할을 했던 오스카는 조카 역할이었던 상대 배우와 통성명을 하고 장소를 떠난다. 그렇다면 그가 행하는 역할극 속에서 존재했던 사람들 역시 누군가에게 지령을 받고 행동했던 것일까.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모션 캡처 연기 상대방이었던 여자도, 납치됐던 모델도 오스카처럼 역할극을 수행하는 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기 가정이 성립하는 데에는 중요한 조건 하나가 필요하다. 역할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스카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실제 인물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을 통해 우리에게 보이는 오스카와 테오의 생김새에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오스카가 테오를 죽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영화를 통해 여러 경계들을 허물고자 했던 레오 까락스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오스카는 죽은 테오를 본인의 모습처럼 변장시킨다. 이 과정에서 오스카는 죽은 줄 알았던 테오에게 일격을 당하고, 자상을 입은 오스카는 테오의 옆자리에 드러눕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이들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게 되고 나머지 한 명은 비 사이를 뚫고 지하 창고를 나선다. 하지만 지하 창고에서 나온 그가 오스카라고 얘기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이후 다른 임무들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 사내를 오스카라고 생각할 수는 있다). 


레오 까락스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본인의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전달한다.

출처 - Daum 영화

살인범 역할까지 포함해 오스카는 극 중에서 총 9개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보는 관점에 따라 악사 역할을 맡은 오스카도 극 중 배우 연기의 범주로 포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침에 집을 나선 멀끔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진짜 오스카의 모습일까? 임무를 수행하는 가면 쓴 사내와 진짜 오스카의 구분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오스카가 아침에 나섰던 집과 저녁에 돌아간 집은 외형뿐만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달랐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오스카는 24시간 연기를 하고 있는 배우일 뿐이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홀리 모터스>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경험'을 다룬 영화라고 했다. 감독이 말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은 무엇일까. 우리들 역시 영화처럼 가면을 쓴 채 역할극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레오 까락스는 끊임없이 모든 경계들을 허문다. 그것이 가상과 현실의 공간이든, 꿈과 현실의 공간이든 그리고 연기와 현실의 공간이든. 모든 공간들은 뒤섞이며 관객은 질문의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관객에게 던져진 질문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양한 역할극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감독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관객들은 정답을 찾지 않아도 좋다. 정답을 찾으러 간 그 발자국들이 진정으로 레오 까락스가 원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잠들어있는(혹은 죽어있는) 관객들을 내려다보는 감독은 허망해 보인다. 더 이상 관객들은 영화를 보지 않으며 극장은 강아지와 아기가 뛰어노는 곳으로 변모했다.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어두웠던 그 극장은 영화라는 예술을 바라보는 레오 까락스의 인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그랬기에 레오 까락스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었던 일은 관객들을 깨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출처 - Daum 영화

오스카의 운전기사였던 셀린은 가면극이 끝난 사내를 집에 태워다 준다. 이후 그녀는 주차장으로 들어가 모든 업무를 마친 후 차에서 가면을 꺼내 착용하고 전화를 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셀린은 왜 가면을 쓴 것일까. 오직 음성만이 들리는 통화를 하면서도 왜 얼굴을 가린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곳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지 알 수 없다. 때로는 진정한 나의 모습이 페르소나를 쓴 나에게 잠식당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본연의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셀린이 주차장을 떠나자 자동차들은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오래되고 낡은 자신들이 버려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이 장면은 영화를 바라보는 레오 까락스의 생각이 투영된 장면이다. 그는 영화가 죽어있고 관객들이 죽어있다고 말하였다. 그의 시선에서 영화는 더 이상 소비되지 않는 예술이었고 오래된 예술이었으며 버려진 예술이었다. 이런 관점은 오스카와 진이 만났던 장소인 폐허가 된 백화점 장면과 이어볼 수도 있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대화와 화면 구성들을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 것이다.


<홀리 모터스>를 본 관객들은 저마다의 생각으로 영화를 곱씹어 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난해한 영화를 앞에 두고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애써 정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 영화의 정답을 찾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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