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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lmbug Nov 05. 2020

<기생충>

- 봉준호의 위대했던 '계획'

출처 - Daum 영화

세상의 정점에 선 이야기꾼


"나는 기생충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히치콕 감독 영화의 경지에 오른 작품이다." 

제72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로빈 캉필로 감독이 한 말이다. <기생충>에 대한 찬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버드맨>과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겼다. "이 영화는 진짜 영화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담겨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매우 로컬 필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영화였다."

이에 더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트위터를 통해 "내가 수상에 이토록 기뻐했던 적은 없었다. 봉준호 감독은 진정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을만한 영화감독이다"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도대체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세계적인 거장들을 이토록 매료시킨 것일까.


봉준호 감독은 제72회 칸영화제에서 대상 격에 해당하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만장일치였다. 모든 외신들은 앞다투어 찬사를 보냈으며 봉준호는 하나의 장르라는 평가까지 내리기도 했다. 벌써부터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부문 수상까지 예상하는 언론들도 있다.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대중성보다 예술성을 더 중요시하는 칸 영화제에서 이뤄낸 쾌거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칸,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를 칭해 세계 3대 영화제라고 한다(모스크바 영화제까지 추가해 세계 4대 영화제로 칭할 때도 있다).

그러나 3대 영화제 중에서도 작년과 올해 넷플릭스 작품들을 거부하며 시네마 본연의 가치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했을 만큼 칸 영화제는 여느 영화제들과 다른 상징성이 있다. 명확한 구분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칸 영화제를 최고 영예로 여기는 평가가 많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작품들은 비교적 친근하고 재밌는 작품들인 반면 칸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은 관객들이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는 점들도 그 이유이다.


아카데미 시상식과 칸 영화제의 대상 격에 해당하는 영화들을 비교하자면 차이가 더욱 명확히 보인다.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목록에는 <그린 북>,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스포트라이트> 등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영화들이 있다면,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 목록에는 <더 스퀘어>, <엉클 분미>, <어둠 속의 댄서>등의 난해한 영화들이 있다. 

봉준호의 필모그래피를 찬찬히 살펴본다면 예술성이라는 부분 역시 적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대중성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영화인 <기생충> 또한 예술영화보다 상업영화에 가깝기 때문에 황금종려상 예측이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또 다른 난관으로 여겨졌던 점은 이미 작년에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기에 콧대 높은 칸 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에 2년 연속 대상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봉준호는 이 모든 난관들을 뚫고 당당히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들었다.


둘째는 보편적인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지극히 한국적이었다는 데 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성찬들이 증명해주듯이 기생충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자본주의 혹은 계급사회를 다루는데 중요한 소스로 사용한 것은 모두 한국인들만 알 수 있는 정서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기택의 가족이 돈을 벌게 된 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기사식당에서의 장면이다. 기사라는 단어와 식당이라는 장소가 합쳐진 이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정서적 함의는 한국인이 아니고서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덧붙여,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기택의 운전경력을 확인하게 될 때에는 실패한 자영업의 상징 같은 '대만 카스테라'가 언급된다. 

대만 카스테라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단순히 빵을 떠올리게 되는 관객과 서민, 자영업, 실패 등의 단어들을 떠올리게 되는 관객의 시선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민혁(박서준)과 기우가 마시는 술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 기택의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구조 등은 우리나라 관객들만이 확실히 디테일을 챙길 수 있는 부분이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오직 한국인만이 100%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렇게 봉준호는 본인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이야기 안 곳곳에 한국인만 맛볼 수 있는 이스터 에그를 숨겨놓고도 전 세계를 매료시켰다. 


셋째는 표준 근로기준법을 지키며 만들어낸 영화라는데 있다.

이는 앞선 두 이유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영화의 완성도와는 무관해 보이는 지점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내세운 원칙과 뚝심이 가져올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클 것이다.


<기생충>은 90% 이상의 분량이 기택과 동익의 집에서 진행된다(동익 집의 지하실도 포함). 동익의 집도 세트이고 기택의 집 및 동네까지 세트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제작비는 예상할 수 있으나 세트를 두 곳만 사용한 것 본다면 많은 돈이 투입된 것은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이 밝혔던 대로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의 집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하강 시퀀스를 찍을 때 서울 곳곳의 지역들을 활용한 것을 빼면 영화를 채우고 있는 전부는 두 집이라고 봐도 과하지 않다.


위와 같은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양의 제작비가 들어간 데에는 봉준호 감독이 지키고자 했던 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스태프들의 노동환경 개선 및 급여 수준 상승이다. 

제작사 입장에서 달가운 소리는 아닐 것이다. 더욱이, 어느 정도의 기반이 잡혀있는 할리우드 촬영 환경 시스템과 달리 국내는 강압적이며 고강도의 노동환경이 영화판을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한 작품을 감독의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작품이 실패했을 때도 그런 화살이 감독에게 돌아가긴 하지만 영화가 성공하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감독 한 명이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가 한 사람만의 예술일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조금은 생소한 미국식 조합 규정을 가지고 영화를 찍었다. 이미 <설국열차>와 <옥자>를 찍으며 경험했던 바이기에 조금 더 원활하게 진행됐을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정확하게 이러한 마음을 드러냈다. 감독과 스태프의 관계가 갑과 을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촬영 현장에서 본인의 결정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환경이 거세지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꼈다고 했다.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누구나 촬영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필연적으로 제작사의 비용 부담으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하기 어려워 보였던 한국영화의 제작환경과 노동환경은 변화를 이끌고자 했던 한 감독의 힘과 생각을 통해 조금이나마 변모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모든 변화가 봉준호 감독 한 명으로부터 촉발된 것은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영화를 만들어냈고 한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디테일로 위대한 우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중성보다 예술성을 더 중요시하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사 100주년에 대한민국의 거장 봉준호는 세상을 뒤흔들었다.


영화라는 숙주를 완전히 지배한 결과 


<기생충>은 봉준호의 영화답게 디테일한 설정과 이야기들이 살아있는 영화이다. 그러나 디테일만을 쫓다 보면 진정으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놓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영화를 100% 받아들이려면(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크게 두 가지로 영화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이는 임의적으로 구분한 것일 뿐 실제로 영화가 분리된 두 가지 개념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먼저, 영화 내의 인물과 배경 등 '설정'을 이해하는 기반이 필요하다. 이런 기반을 이해해야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은 교훈을 주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안에서의 물음은 영화 안에서 모두 끝나며,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을 그린 영화이다. 속된 말로 모든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어려운 영화가 아닌 쉬운 영화이다. 실제로 이는 많은 관객들의 관람후기가 증명한다. 기생충은 영화의 내러티브만 읽어내도 재밌는 영화이고 설정에 담긴 내용들을 해석해도 재밌는 영화이다.


봉준호는 본인만의 디테일을 이용해 자본주의 하에서의 계층 간의 삶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반지하에서 밖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그대로 내려오는 장면이다. 뒤이어 나오는 장면은 와이파이를 찾는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이며 이 둘은 화장실에 위치한 이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겨우 신호를 받는다.

와이파이를 연결해하게 된 피자박스 접는 일을 하는 기택의 가족들을 볼 수 있는데 별 다른 대사 없이도 소독 가스가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면과 함께 배치한 이 장면은 기택네 가족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이밖에도 피자박스를 받으러 온 매니저로 보이는 여자의 모자에 가득한 밀가루나 처음엔 저가 맥주로 여겨지는 '필라이트'를 마시다가 이후 온 가족이 박사장의 집에서 일하게 된 후 마시는 술을 보면 '삿포로'로 바뀌어있다(충숙만이 같은 맥주를 마시는데 감독은 이를 두고 '남는 것을 먹는 엄마의 마음'이라 하였다). 


송강호는 영화 초반 집에 들어온 꼽등이를 내쫓는다. 꼽등이는 연가시라는 기생충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숙주 중 하나이다. 그런 꼽등이를 쫓아낸 장면은 이후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의 가족에게 기생하고 숙주인 그들을 쫓아낼 것이라는 시각적인 암시도 담겨있다.

출처 - Daum 영화

계급을 다룬 많은 영화들이 그렇듯이 <기생충> 역시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를 통해 위계를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다만 다른 영화들과 차별되는 것은 수평과 수직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통해서도 계급사회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두 개를 나눠서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을 수 있으나 집 안에서의 공간과 집 밖의 공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초반 피자박스 알바를 끝내고 집 안에 일렬로 서있는 기택의 가족들을 보면 현관부터 거실까지 일렬로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인물들을 사선에서 찍어 모두 한 앵글에 담아낸 것은 공간이 주는 협소함과 이후에 나올 대저택과 비교를 위한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수평의 공간이었던 기택의 집과 달리 박사장의 집은 수직의 공간으로 이동이 이루어진다. 저택의 안에서 인물들이 이동할 때 측면에서 찍는 것은 계단으로 내려오는 하강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면서 내러티브가 뒤집히는 기점이 되는 문광의 지하 공간은 왜 수직의 이미지가 중요한지 상기시켜주는 장소이다. 문광과 근세가 머물고 있는 지하실이 드러나기 전까지 이 영화는 꽤나 단순해 보이는 플롯 구조를 가지고 있다.

4대 4로 매칭 된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 부자 가족의 부를 부러워한 가난한 가족이 그 집안에 침투하며 그들을 축출해내는 이야기.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며 여기까지의 묘사로도 자본주의나 계급 등에 대한 영화적 메타포 사용은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봉준호가 바라본 이 시대의 부는, 계급은, 갈등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나쁜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에 의해 처벌받아야 하는, 부를 축적한 사람은 모두 부정부패를 통했으며 그를 단벌 해야 한다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현대의 계급 갈등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저 그런 상업영화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게 된 건 봉준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 등장하는 세 가족을 굳이 비유하자면 지상에서 살고 있는 박사장의 가족,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의 가족, 지하에 살고 있는 문광(이정은)의 가족까지 총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를 다시 읽어내면 '부자-가난한 자-더욱 가난한 자'의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기택의 가족이 반지하에서 사는 것이 아주 중요한 설정인 이유는 단순하게 가난을 드러내는 것보다 여기에 있다.

진짜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지하의 사람들과 구분해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 단계의 구조를 보여주고 분노의 화살표를 그리라고 하면 우리는 모두 아래 두 집의 화살표가 가장 상층부인 지상(박사장)을 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적개심과 분노는 서로를 향한다. 오히려 부를 향유하고 있는 박사장의 가족은 존경의 대상일 뿐이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더 잘 살아보고자 지하에 사는 사람들을 몰아내야 했다. 그나마 손에 쥔 것을 가지고도 반지하와 지하는 싸워야 했고 이들은 결국 서로를 죽여야 했다.


문광 가족과 기택 가족이 지하실에서 처음 대면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위협한다. 반면 두 가족 모두 박사장의 가족을 지키려고 한다. 기택은 문광에게 박사장이 쓸데없는 걱정하게 만들지 말라고 소리치고, 근세는 박사장의 귀가를 피를 흘리면서도 반긴다(리스펙트라는 단어를 언급하기도 한다). 

가슴 아프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나보다 더욱 못 가진 자의 것을 뺏어서라도 가지려고 한다. 우리가 타도해야 할 대상은 저기 위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내 아래에 있는 누군가이다.


봉준호는 부의 움직임과 계급 간의 갈등을 놀라우리만치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해냈고 구구절절한 텍스트 없이 단순한 세 공간의 비교로도 효과적으로 전달해냈다.

출처 - Daum 영화

집이라는 공간 내에서의 수평과 수직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집 밖의 공간에서의 상승과 하강이다. 카메라는 공간에 대한 이미지를 관객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카메라를 움직인다. 

기우나 의 박사장 자택 첫 방문을 제외하더라도, 박사장의 집으로 들어가는 묘사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항상 로우 앵글로 인물을 쫓아간다. 

카메라가 박사장의 공간으로 들어갈 때 로우앵글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상승의 이미지인 것이다. 어딘가를 올라간다는 행위,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는 시선 등은 앞선 수직 이미지와 합쳐져 부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또 하나 박사장의 공간에서 상승의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이후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의 가족이라는 숙주에서 축출되는 과정을 그린 시퀀스가 있기 때문이다. 겨우 문광을 몰아내고 기생에 성공한 듯했으나 결국 기택의 가족은 숙주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다.

박사장의 집에서 나와 기택의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그렇게 오래 필요하지 않다. 박사장의 집에서 나오는 장면 하나, 기택이 동네에 도착한 장면 하나만 붙여도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는 집요하게도 비 오는 밤 박사장의 집에서 허둥지둥 탈출하는 기택의 가족을 따라가며 잡는다. 집에서 이어진 언덕뿐만 아니라 계단을 내려오고 터널을 지나며 다시 계단을 내려오는 어찌 보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지상의 공간 중 가장 아래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한 모습을 연출한다. 따라갈 때마저도 익스트림 롱 쇼트, 트래킹 쇼트, 로우 앵글 등 다양한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이렇게까지 그들의 탈출 과정을 상세히 따라갔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도착하게 되는 원래의 '우리'집엔 희망이 존재해서 안 되기 때문이다. 감히 부당하게 부를 탐하려 했던 그들에게 어중간한 절망은 필요치 않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누군가에겐 캠핑놀이의 좋은 조건이 누군가에겐 집이 침수되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현실이고 그게 오늘날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행방을 몰랐던 기택의 마지막 거처는 근세와 문광이 머무르던 지하였다. 특이한 것은 기택이 누군가에게 의해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금했다는 점이다. 지상의 공간엔 어느 부유한 새 가족이 이사 왔지만 지하의 공간은 여전히 공실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영화를 관통하던 주제의식과 같은 선상에서 본다면 기택의 지하공간 입성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난한 자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기우가 기택의 나이가 되더라도 그들이 집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 번 아래를 향한 화살표는 불가역적인 힘에 의해 아래만을 가리키게 된다.


수평과 수직, 상승과 하강. 봉준호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교과서처럼 보이는 단순한 공간 대비를 사용하면서도 섬뜩하리만큼 무섭고 무거운 이야기를 담아냈다.

출처 - Daum 영화

인디언은 주권이나 토지, 약탈이나 박탈 등의 테마가 등장할 때 쓰이는 단골 소재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의 인디언은 컵 스카우트, 모스 부호와 어울려 어느 정도의 균일점을 찾아낸 정도일 뿐 과하게 사용되는 소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의 기본적인 소재의 상징성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몇몇 장면들이 있다.


처음 기우가 민혁을 대신해 과외선생으로 집에 입성할 때 다송은 인디언 분장을 한 채 기우에게 활을 겨눈다. 이는 과거 영국인에 대항하여 토지를 지키려 했던 인디언들의 투쟁과 같은 장면으로 볼 수 있으며 추후 기우의 가족이 동익의 가족네 집을 점령할 것이라는 암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연교가 다송의 인디언 복장을 설명하며 미국에서 직접 구입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들의 영토를 몰아내고 세운 국가에서 생산한 제품을 가져왔다는 의미로 초상화와 원숭이를 헷갈려하는 장면과 함께 부자, 사회 지도층들의 허례허식 및 이율배반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위와 같이 <기생충>엔 레퍼런스도 많고 굳이 의미부여를 한다면 숨어있는 의미들도 많다. 물론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 숨어있는 감독의 의도를 파헤치며 영화를 본다면 보다 재밌는 감상법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자그마한 디테일들을 사용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봉준호는 앞서 언급했던 영화 내의 공간의 이미지를 활용한 방법 말고도 본인의 강점인 시각과 이야기를 통한 디테일로써 계급 간의 어우러짐, 계층이 처한 현실을 잘 나타냈다.


먼저, 문광과 근세가 같이 삶을 꾸려오던 지하실에 대한 묘사이다. 지하실에서 문광의 남편에게 도착하는 비밀의 문 위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쓰여있는 가랜드가 붙어있다.

크리스마스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한 탄생의 주인공은 위대한 예수가 아니었다. 보잘것없고 힘 없이 누워있는 한 사내였을 뿐이다. 설레는 분위기와 축제를 떠올리며 들어가게 되는 문엔 사회에서 격리된(자의든 타의든) 부의 최하층에 속해있는 사람만이 있었을 뿐이다.  


연교는 캠핑이 취소되고 집으로 돌아오며 가정부인 충숙에게 라면과 짜파게티를 혼합한 '짜파구리'를 끓여줄 것을 부탁한다. 여기에 특별한 주문을 하나 하는데 두 라면을 섞은 인스턴트 음식에 한우 채끝살을 넣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대표적인 인스턴트 음식인 라면을 먹이면서도 최고급 재료를 넣어서 주고 싶어 하는 허영심에 가득 찬 부자들의 모습이며, 다른 하나는 영화 내에서의 계층 간 역학구도를 표현한 것이다.


영화 내에서는 단시간에 묘사되지만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진 박사장은 직업은 VR 기계를 만드는 IT기업의 잘 나가는 대표이다. 수많은 직업군 중에서 왜 하필 VR 기계를 만드는 기업의 대표였을까. 

VR은 가상현실을 뜻한다. 가상현실이란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특정한 공간이나 상황 등을 구현해내는 기술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에 머무르면서도 제대로 된 현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익은 기정의 함정에 두 번이나 걸리는 인물이다(운전기사, 가정부 상담소). 현실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업가처럼 나오지만 정작 본인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기 장면들은 곳곳에 분포하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나 구조 등을 훌륭하게 대변해낸다.


<기생충>은 상업성에 중점을 둔 영화로 보더라도 훌륭하며, 예술성에 중점을 둔 영화로 보더라도 훌륭하다.

그만큼 영화의 무게중심에 대한 저울질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가족 4명을 대비시키고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의 것을 빼앗고 점령하는 과정을 묘사했더라면 그저 평범한 영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의 특별한 상상력이 가미된 지하실이라는 공간이 드러나는 순간 <기생충>은 급변하며 요동친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1, 2권으로 나눠진 책에서 진짜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2권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빈 캉필로 감독은 이 영화를 칭송하며 알프레드 히치콕을 소환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너무나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굳이 대표작을 한 가지 꼽는다면 <싸이코>일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기생충>은 <싸이코>와 닮아있는 부분들이 많다.


<싸이코>의 전반부는 평범한 한 여자가 돈을 훔쳐 잠적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특정한 플롯이 발생한 후부터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는 기생충과 같은데 그 사건이 <싸이코>에서는 마리온이 모텔에 묵는 일이라면, 기생충에서는 문광이 지하실을 개방하는 일이다.

또한, <싸이코>에서 가장 유명한 시퀀스 중 하나인 물이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은 <기생충>에서 폭우가 지하로 통하는 배수구로 흘러들어 가는 장면으로 대치시킬 수 있다(일종의 오마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근세가 식칼을 들고 섬뜩하게 나서는 장면은 노먼 베이츠를 떠올리게 한다.


<싸이코>는 영화사에서 위대한 작품을 언급할 때(더욱이 스릴러라면) 교과서처럼 등장하는 작품이다. <기생충>이란 작품의 위상이 황금종려상을 기점으로 수직 상승하더라도 알프레드 히치콕의 그것에 비할 수 있을지는 담보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한국에서도 <싸이코>처럼 후세에 소환될만한 명작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교훈과 메시지가 없더라도


<기생충>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중 절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예술 작품들에서 묘사하는 '부유한 사람=나쁜 사람, 가난한 사람=착한 사람'의 공식이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부를 가지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일까. 그들은 모두 부당한 방법이나 불법적인 일들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일까. 

반대로 가난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일까. 가난한 사람들은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았기에 가난해진 것일까. 


정답은 '아니오'다.

 

위의 전제들이 성립하려면 부유한 사람들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단계적으로 층위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부의 수준과 그 부를 향유하고 있는 사람의 인성이 비례해야 한다. 더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은 보통의 부를 가진 사람보다 악랄하고 비겁해야 하며, 더 많이 가난한 사람은 그냥 가난한 사람보다 착하고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세상은 그렇지 않다. 부를 가진 사람이라고 나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착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부자여서 처벌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가난해서 더 많은 기회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식의 권선징악 구조를 따라가는 영화는 고전 우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출처 - Daum 영화

동익의 가족이 캠핑을 떠났을 때 박사장의 집에 있던 충숙은 재력이 선함을 만드는 요소라고 얘기한다. 재력과 선함의 인과관계에서 다른 한 요소의 결과를 야기시킨 원인은 선함이 아닌 돈인 것이다. 자조적으로 가족들에게 본인의 생각을 말하며 충숙 본인은 돈이 있다면 더욱 선해질 수 있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지하실에서 문광의 남편을 마주친 충숙은 본인보다 가진 것이 없는 문광과 근세를 옥죄며 협박한다. 이어진 장면에서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 네 집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알게 된 문광은 반대로 충숙을 협박한다.

누군가의 눈에 부유했던 충숙은 전혀 선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충숙보다 가난했던 문광은 충숙보다 더 나쁘지도 않았다. 


폭우가 내린 날 다송이에겐 인디언 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형성되었다. 어느 공간에선 홀로 펼쳐진 텐트 하나 무너뜨리지 못했던 비가 어느 공간에선 동네 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 있는 폭우가 되었다. 

전날의 폭우가 연교의 가족에겐 미세먼지 하나 없는 청아한 하늘을 선물했고 기택의 가족에겐 집을 잃고 체육관에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파티를 준비하러 가는 연교가 차 안에서 통화하며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하는 말에 기택은 심기는 불편해진다. 이어진 장면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창문을 여는 연교는 동익에게 선을 넘었던 '그 냄새'를 기택에게 상기시킨다.

이런 분노들이 축적된 끝에 가난한 자와 더 가난한 자 서로를 향하고 있던 칼끝이 처음으로 그 위를 향한다.


결국 그 마당엔 지상-반지하-지하에 살고 있던 모든 계층의 인물들이 한 명씩 죽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모두 죽음을 맞을 만큼 잘못된 행동들은 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 서있는 위치에서 바라보고 영위했던 삶이 달라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수재민이 되어 생활 터전을 잃고 체육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 모두 본인들이 사는 생활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부유한 자에겐 천국이었던 하루가 가난한 자에겐 지옥 같은 하루였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후 행방을 찾을 수 없던 기택은 결국 그렇게 기생하고 싶어 했던 그 저택에 자리하고 있다. 다만 그가 서있는 공간은 지상이 아닌 지하이다. 암울하지만 반지하에 살던 기택이 어떻게 노력해도 결국 도달할 수 있던 곳은 더 아래에 위치한 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택 본인도 기택을 바라보는 가족들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슬픈 우화의 결말은 예정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택이 반지하에서 지하로 내려오게 된 결과야말로 차분하게 세상을 응시한 봉준호가 마주한 '진짜' 현실인 것이다. 결국 <기생충>은 이렇게 끝나야 했고 봉준호는 그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교훈을 전달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건네야만 예술성이 높고 좋은 영화는 아니다. <기생충>은 그러한 전제를 반박하기에 너무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이야기로써도 훌륭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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