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의 어른 되기 프로젝트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파릇파릇했던 20대 시절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무척 기뻤다. ‘나도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 몰래 피던 담배도 대 놓고 폈다. 담배를 대 놓고 필 수 있게 되었으니 ‘어른’이라 생각했다. 참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다.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우쭐했던 20대를 보내고, 스물아홉 때 인도 여행을 떠났다. 여행도중 남인도 어디쯤에 있는 ‘함피’라는 곳에서 홀로 서른을 맞았다. 창문도 없던 싸구려 게스트하우스였다. 자정이 되자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함께 함성이 들렸다. 문을 열고 나갔다.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앳된 종업원이 “해피 뉴이어”라고 수줍게 말했다. 그렇게 1995년이 되고, 나는 서른이 되었다.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발코니에서 시끌벅적한 동네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때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대가 끝나는 것이 아쉽기보다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살짝 좋았다.
마흔은 어떻게 맞이했는지 기억이 없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세월이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모르는 중에 맞이했기 때문이다.
다시 10년 후, 오십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 먹는 것이 싫다고 했지만, 나는 싫지 않았다. 흰머리도 희끗희끗한 것이, 이제야 노련한 어른이 된 듯한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숙하고 성장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심으로 즐겁고 뿌듯하게 50대를 맞이했다. 그런 만큼 50대를 활기차게 살았기도 했다.
9년이 지났다. 그러니까 작년 2024년이 되겠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내년이면 육십이네’ 하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나 스스로도 ‘내년이면 육십이군’하는 생각을 가끔 했다.
지난 39년을 되돌아보았다. 어른이 되어 기뻐했던 20대가 생각났다.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30대가 있었다. 삶의 노련미가 느껴져 기분 좋아했던 50대도 통과했다. 그렇다면, 60대가 되면 나는 얼마나 더 노련해지고,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져 있어야 했을까. 그런 내가 맞이할 60대는 말 그대로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경지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 것이맞지 않을까.
나는 어떠했을까?
2025년 1월, 마침내 60대를 맞이했다. 20대와 30대, 40대와 50대를 순차적으로 거치는 동안 나는 성장과 성숙을 통해 어른에 조금씩 더 다가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10년마다 내 삶이 업그레이드 된다고 믿었고, 그래서 새로운 10년을 맞이할 때마다 기분이 살짝 좋았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60대는 그 어떤 새로운 10년의 시작보다 더 기쁘고 의미있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지난 40년 동안 순차적으로 조금씩 업그레이드 되는 삶을 살았고, 그래야 지난날의 내 삶과 현재가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60대는 50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노련미니 성장이니 성숙이니 하는 멋진 이미지들과 전혀 연결되지 못했다. 대신 60대란 말을 생각만 해도 우울했다. 자연히 새해 첫날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식구들과 새해 해돋이 사진을 찍고, 이웃들과 호들갑스럽게 새해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돌아서면 우울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어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노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돌아갈 수 있으면 다시 50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갈 재주는 없었으니 나는 무기력하게 60대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20대부터 10년을 주기로 내 인생에 부여했던 그 점잖고 멋진 의미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20대부터 내 인생은 해마다 알차게, 맛있게 잘 익어 간다고 생각했다. 그런 세월을 40년이나 살았다. 그 과정을 거치면 서 성장과 성숙의 축적이 내 인생에 꽤나 두텁게 쌓였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마주할 60대는, 50대가 되었을 때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지고, 훨씬 더 울림이 있는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의 경지를 넘어 삶에 통달한 ‘귀인’쯤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현실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순차적으로 성숙하고 성장했다고 믿었는데, 60대를 맞이하는 순간, 성장이 아니라 오히려 퇴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동안 경험했던 여러 증상들이 퇴행의 징조였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그러한 증상들이 내 인생의 성숙과 성장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들은 그냥 내가 가진 부족하고 불편한 성향들일 뿐이었고,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진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육체적 노화에 의해 젊었을때보다 다소 무뎌진 외형적 모습을 인생의 노련미와 성장과 성숙으로 곡해했을 뿐이었다. 겉모습이 조금 무뎌져 가는 동안 내면세계는 분명 퇴행을 거듭하며 더 모가 나가 있었을 뿐이었다.
별것 아닌 것에 낙담하고, 별것 아닌 것에 분노하고, 참을성은 더 빈약해지고, 타인에 대한 너그러움은 찾을 수가 없었다. 즐거움을 뒤로 미룬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당장의 결과물이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 하고 불안해하고 불편해 했다. 여기에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불필요한 말을 남발하며,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무턱대고 앞서따. 잘못을 인정하기 거부하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억지를 부리는 일들이 잦아졌다.
분명 성숙과 성장과는 거리가 먼 증상들이었다. ‘이순(耳順)’은 커녕 상대방의 순순한 호감 표시도 저의를 갖고 하는 말인지 모른다며 곡해 하기를 서슴치 않았으니 퇴행 말고 다른 것으로는 도대체 설명이 되지 않았다.
60대를 맞이한 내가 맞닥뜨린 것은 잘 익은 내 인생이 아니라 익기도 전에 누렇게 농해가고 있는 모순 투성의 못난 내 모습이었다. 육십이란 말을 듣는 순간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온몸으로 60대를 피하고 싶었던 것도 내 삶의 퇴행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인 방어 작용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나는, 내 생각과 달리 지난 40년 동안 순차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뤄내지 못하고 오히려 퇴행을 일삼았다. 이를 두고 세상 사람들은 ‘헛살았다’고 표현한다.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올해 초, 두어 달 남짓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헛살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때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지난 내 삶이 부끄러웠다. 어른이 되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보지도 못하고 늙어버린 내 몸뚱이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주인 잘못 만나 네가 고생이 많다.’
이런 말로 나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도 했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좀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진짜 성숙한 어른이 되기위한 방법들을 찾기 시작했다.
새는 땅에서 나는 연습을 충분히 하고 난 뒤 날지 않는다. 둥지 속에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만 받아먹고 살다가 어느 날 둥지를 박차오른다. 내게는 그런 새 같은 결단이 필요했다.
어느 날 새벽, 나는 새처럼 둥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 때는 부러지더라도 일단 날아보자는 생각으로. 그리고 오늘 아침 131번째 비행을 했다.
육십이 되었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인 내가,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도구로 삼은 것이 ‘명상’이다. 지난 2월 20일 새벽부터 시작한 나의 명상 비행은 오늘로 131번째 비행을 맞이했다.
‘어른이’가 아니라 나를 진짜 ‘어른’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명상을 통해, 내가 조금씩 ‘어른이’의 탈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60대 ‘어른이’의 때 늦은 의욕이라면 의욕이라 하겠다. 기대에 부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치열하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 있다. 물론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요즘 날마다 몸으로 느끼며 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