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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일상을 조금씩 연결하다

가능하면 나를 의식하며 살려고 한다

by 우연의 음악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부터 한다.

137일째다.

오늘 아침에도 정확하게 50분 동안 명상을 했다.


오직 숨을 들이 마시고 내 뱉는 행위에 집중한채 앉아 있다보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편안해진다. 그런 느낌은 명상을 할 때마다 경험한다. 그럴 때면 ‘행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명상을 직접 해 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리라.


사실, 명상을 한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젊은 시절 인도에 다녀온 뒤부터 했으니까 얼추 30년은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늘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날마다 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마음이 심란하면 명상을 한답시며 앉아 있곤 하는 정도였다.


좀 꾸준히 해 보겠다는 생각에 날마다 했던 적도 있다. 오래 가지는 않았다. 길어야 두어달 정도. 한 번 명상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15분내지 30분 정도. 몇 달 명상을 하다가 하루이틀 안 하기 시작하다보면 한 달 두 달이 되고, 어느새 1년 2년이 되는 날들이 많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도 못했다. 명상을 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일종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지만, 명상을 하기 위해 앉기까지는 일종의 의무감이 동반되어었다. 그렇게 명상은 잊을만 하면 의무감에 한 번 씩 하는, 밀린 숙제 같은 것은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는 내 삶이 명상을 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견딜 만’ 했던 모양이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명상을 하지 않고도 나름 즐겁고, 나름 행복하고, 나름 의미있게 살 수 있었다면 괜찮은 것이었으니까. 마치 최신 의료 시설을 잘 갖춘 병원이 바로 옆에 있다고 해도, 그런 병원에 드나들지 않고도 아프지 않고 잘 살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처럼 말이다.


육십이 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몸이 허약해진 것처럼 정신세계도 조금씩 허약해졌다. 그런데도 나는, 육체와 달리 정신세계는 세월과 함께 조금씩 성장한다고 믿고 살았다. 서른이 되었을 때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 좋아하고, 오십이 되었을 때 늙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마치 세상 살이에 노련한 사람이 된 것처럼 흐뭇해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착각이었다. 나의 내면 세계 역시 몸뚱아리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퇴행을 거듭하고 있었다. 퇴행의 현실을 육십이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철 들자 벼락박에 똥칠한다’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육체적 퇴행은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몸이 찌뿌둥하다거나, 쉽게 피로해진다거나, 무릎이 아프다거나. 어쨌거나 내 몸이 가장 먼저 불편한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히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퇴행을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헬스장에 등록을 하거나 수영 강습을 받는다. 친구들과 어울려 등산을 다니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녁먹고 동네 공원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노력은 하지 않는다해도 적어도 문제 의식은 갖는다. '내 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구나' 나도 그랬다. 저녁먹고 동네 공원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한 것도 그맘 때 쯤이다.


정신세계의 퇴행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적절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알아차리지 못해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아도 하등 불편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것이 없었으니 별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그 과정에서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불편함을 ‘내’가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타인’이 겪었기에 몰랐을 뿐이다. 내 육신이 퇴행하면서 ‘내’가 힘들고, 내 정신세계가 퇴행하면서 ‘타인’이 불편하고, 심하면 ‘열받아 죽었다’는 사실을 육십이 되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본격적으로 명상을 시작한 것은 내 정신세계의 퇴행의 가속도를 줄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육십이나 되었으니 퇴행의 가속도는 탄력을 받을 만큼 받아 조절이 어려울정도로 고속 상태였다. 자연히 주변을 위협하며 아슬아슬한 곡예 질주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여기 저기 부딪히면서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질주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었다.


이미 오래전에 명상의 힘과 효과를 경험해본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지만, 명상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유효했다.


명상을 통해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허약해져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허약한 정신세계가 내 삶의 컨트롤 타워를 자처하며 나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오호통제라!


예전에도 명상을 했지만, 명상이 일상의 삶과 연결되지 못하고 헛돌았다. 명상을 하는 동안 나를 더 오래, 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과정에서 평화로움과 편안함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일상의 평화로움과 편안함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마치 한편의 재미난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육십이 되어서야 명상이 명상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에서 그 평화로움과 편안함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간단한 사실을 아는데 30년이 걸렸다.


나는 요즘 길을 걷거나,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내 몸을 의식한다. 마치 명상 상태에서 내가 어떤 자세로 앉아 숨을 쉬고 있는지 나 자신을 의식하는 것처럼.


일상의 내 행동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바른 자세로 앉고 걷는다. 힘차게 걷지만 조용히 가볍게 걷는다. 물론 수시로 놓치기 일쑤다. 놓치는 순간, 어깨가 구부정해지거나 건들거리며 걷고 있다. 다행히 오래가지는 않는다. 재빨리 다시 내 몸에 의식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명상을 다시 시작한지 오늘째로 137일째다. 그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명상을 계속했다. 우선 순위 1순위에 명상을 올려 놓았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50분 동안 명상을 할 수 없는 날이면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했다. 나중에라도 시간을 내어 부족한 명상 시간을 채우기도 했다.


지금 나는 일상의 삶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고, 그 말을 어떤 목소리로, 어떤 태도로 말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식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의식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알아차림’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늘 그렇지는 못하다. 아주 자주 의식의 끈을 놓칠 때가 많다. 의식의 끈을 놓치는 순간 자세가 흐트러지듯 불필요한 말을 하거나, 기분이 태도가 되는 나를 발견한다. 다행히 예전과 달리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제법 빠른 속도로 의식의 끈을 다시 붙잡는다.


‘너무 그렇게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이런 저런 것들을 의식하며 살면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달프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맞다. 의식하지 않고도 늘 바른 자세로 행동하고, 늘 적절한 말을 하고, 늘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감정과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류의 인간에 속하지 못한다. 의식의 끈을 놓치는 순간, 자세가 흐트러지고, 행동이 거칠어지고, 감정에 휘둘리고, 불필요하고 적절치 못한 말을 내뱉고,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에 휩싸인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명상이 그 끈을 놓지 않게 해주는 좋은 방편이라 생각한다.


명상을 다시 시작하고부터, 명상과 일상의 삶을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요즘, 나의 정신세계가 조금씩 퇴행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느낌이 점점 더 구체화 되고, 지속적인 현실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글에서는 명상을 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한다. 부족한 내 글을 늘 읽어주는 독자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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