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지만, 절대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에는 유명한 보석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보석들에게는 저주가 씌였다고 할 정도로 비극의 역사가 곁들여 있는 경우가 많다. 그건 아마도 진짜 보석이 불운을 가져다 주는 저주가 씌였기 때문이 아니라, 보석을 가질 정도로 힘이 있는 자에게는 무릇 권력과 이에 걸맞는 야망이 있기 마련이고, 지나친 욕심은 파멸에 이르고 절대적인 권력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세기의 진주라고 알려진 라 페레그리나도 그렇다.
얼마나 방랑을 했는지 이 아름다운 보석의 이름은 순례자 또는 방랑자라는 의미의 '라 페레그리나(La Peregrina)'다. 물방울 모양의 순백색 진주는 애초에 223.8그레인(55.95캐럿)이었지만 500년간의 세월을 겪으며 지금은 세공을 거쳐 203.84그레인(50.96캐럿) 정도가 되는 엄청난 크기의 진주로, 지금은 겹줄의 진주와 화려한 루비, 다이아몬드와 함께 아름다운 목걸이로 세팅되어서,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환영을 선사한다.
이 엄청난 크기의 진주는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파나마 해안가에서 한 노예가 발견한 것이었다. 이 착한 노예는 자신이 발견한 진주를 파나마를 통치하던 관료에게 상납하였고 그 결과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하니, 어찌보면 현명한 선택이었을 테다. 한낱 노예가 이 아름다운 진주를 갖고 있었다고 한들 어떤 소용이 있었을까. 강도를 당하고 죽임을 면하면 다행이었을 테다. 값진 물건을 지니려면 이를 지킬 수 있을만큼의 권력이 필요한 법이니.
이 진주는 스페인 국왕의 손에 들어갔고, 스페인의 국보가 되었다. 이후에 스페인 국왕이 될 펠리페 왕자는 영국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과 결혼 예물로 이 아름다운 보석을 선물했다. 여기서 메리 여왕은 피의 메리로 알려진 메리 1세로, 알려진 바와 같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아버지가 행한 종교 개혁을 뒤엎는 과정에서 개신교와 성공회 신자들 수백명을 처형하여 '피의 메리(Bloody Mary)'라고 불렸다.
때문에 당시 영국의 관료사회는 개신교와 성공회 신자들은 메리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찬 상태였는데, 공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왕자와 결혼한다니 반대하는 자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펠리페 2세 또한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이 평생의 이상이었을 정도로 신실한 가톨릭교였기에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런 점에서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펠리페를 좋아한 메리와 달리, 펠리페는 메리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메리는 나이가 거의 마흔에 가깝고 펠리페와 열살이나 차이가 난데다가, 초상화와 달리 메리는 외모가 썩 호감형은 아닌 데에 비해 펠리페는 꽤 미남형이었다고 하니 그럴 법도 하다.
결혼 후에도 펠리페는 일이 많다는 이유로 영국에 머물기보다는 스페인에 있었기에 상사병에 걸렸고, 간절히 아이를 바라던 메리는 상상 임신을 했다고 하니, 아름다운 진주 라 페레그리나를 가진들 썩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국민들과 관료들도 자신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뒤늦게 얻은 남편조차도 자기를 멀리했으니 말이다. 대신 펠리페에게 선물받은 라 페레그리나만큼은 얼마나 아꼈는지, 라 펠레그리나를 펜던트 겸 브로치로 하고 있는 메리 1세의 초상화가 지금까지도 많이 남아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메리는 결혼한지 4년 후에 난소 종양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고, 영국 사람들은 그녀의 사망일을 폭정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라며 축하를 한 한편, 그녀가 애지중지했던 라 페레그리나는 다시 스페인 왕실로 반환되었다. 이후에는 약 250년 간 라 펠레그리나가 스페인의 국보로서 스페인 왕족들에게 사랑받았지만,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펠리페 3세의 부인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 마르가리타 왕비와 펠리페 3세 본인은 라 페레그리나를 목걸이처럼 때로는 모자 장식으로 착용하면서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고, 펠리페 4세의 부인이었던 프랑스 출신 이사벨 왕비도 라 페레그리나를 아꼈는지 라 페레그리나를 착용한 초상화가 남아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진주를 몸에 지닌 그들의 삶은 비극이었으니, 펠리페 3세는 드넓은 스페인 제국을 통치하고 국정을 운영할 만한 능력이 없었고, 때문에 아버지였던 펠리페 2세가 탄식을 하며 죽기 전까지 아들과 제국에 대한 걱정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민심이 흉흉해질 뿐 아니라 경제도 위기에 처하고 외교문제도 산더미처럼 남겨둔 채로 스스로도 왕이 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말을 남기며 서거하였지만, 아들인 펠리페 4세 또한 역시 무능할 뿐이었다.
펠리페 4세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고 16살에 왕위를 계승하면서 국정운영에 실패한 왕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하지만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기 때문에 스페인 문화의 황금기를 이끈 문화적 후원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해냈는데, 벨라스케스가 궁정화가로 이름을 떨칠 수 있게 그 실력을 일찍이 발견해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사람이자, 루벤스 등 훌륭한 화가들의 그림을 사서 미술관을 넓히고 왕국을 아름답게 건설해내기도 했다.
그런 펠리페 4세는 겨우 10살에 이사벨 왕비와 결혼을 했지만, 탐미적인 사람이었기에 항상 여러 명의 정부를 두는 난봉꾼이었다. 세계적인 카사노바로 알려진 돈 후안의 모델이 펠리페 4세였다고 하니 얼마나 이사벨 왕비가 마음이 아팠을까.
라 펠레그리나를 스페인 왕국이 소유하는 동안 점점 무적함대 스페인 제국의 힘은 쇠약해져 갔고, 결국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나폴레옹의 형이었던 조제프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조제프가 점령한 5년 동안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이 힘을 합쳐 철저히 프랑스 세력에 맞서 싸우면서 다시 영토를 회복했지만, 조제프가 프랑스로 도망가면서 스페인의 국보였던 라 페레그리나만큼은 숨겨 가지고 나오면서 프랑스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이후 나폴레옹은 결국 영국에 의해 격패당했고 덩달아 조제프도 미국으로 도망하듯 이주했다. 하지만 유럽이 그리웠던 것인지 영국과 네덜란드를 떠돌아 다니며 말년을 보내던중 결국 죽음을 맞게 되고, 과거 스페인을 지배하던 영광이 서린 라 페레그리나를 자신의 조카인 찰스 루이스 보나파르트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찰스 루이스 보나파르트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고자 프랑스에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결국 미국으로 쫓겨나게 되고, 이후 스위스로 돌아오지만 다시 환영받지 못하고 영국으로 쫓겨나게 된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을 보내던 도중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귀족 애버콘(Abercorn) 가문의 제임스 해밀턴 후작에게 라 페레그리나를 팔았다고 한다. 후작은 라 펠레그리나를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애버콘 가문의 가보로 이어가며 소중히 다뤄왔지만, 1969년에 소더비 경매에 내어놓았다고 한다.
놀랍게도 경매에서 라 페레그리나를 낙찰받은 사람은 배우 리처드 버튼이었다. 호가보다도 훨씬 높은 3만7천 달러에 말이다. 리처드 버튼이 보석광이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이 진주를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주기 위해 낙찰받은 것이었는데,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는지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라며 아무 이유 없이도 세기의 보석들을 선물로 주곤 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라 페레그리나를 선물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스페인 왕가에서 세팅한 주얼리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까르띠에에 맡겨서 더 많은 진주, 루비,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 더욱 더 화려함을 가미하여 지금의 목걸이로 만들었다.
둘은 정말 열렬하게 사랑했지만, 뜨거웠던 사랑만큼이나 뜨겁게 둘의 사랑은 식었다. 리처드 버튼은 세상의 보석을 모두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안겨주고 싶어할 정도로 로맨틱한 사람이었지만, 다혈질적이고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둘은 사랑하는 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싸웠다고 한다.
어찌 보면, 방랑하는 진주, 라 페레그리나라는 이름에 걸맞게 둘은 방랑하는 사랑을 했는데, 두 커플은 두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두번째 결혼은 일년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말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후에 크리스티의 경매에서는 아시아 출신의 한 익명의 콜렉터가 1184만 2500달러로 이 보석을 낙찰받았다고 한다. 방랑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남아메리카의 파나마에서 시작해,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을 거쳐, 유럽의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을 지나, 미국에서 새로 치장을 하고, 이제는 아시아로 방랑하는 세기의 진주.
그러고 보면 라 페레그리나는 당대 최대의 권력을 누린 자의 손에 들어갔다. 힘이 곧 권력이던 시절에는 무적 함대를 지닌 스페인 제국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가문에게, 돈이 곧 권력이 된 시절에는 영국의 귀족 가문에게, 더 나아가 전세계 스크린을 점령한 배우 커플에게, 이제는 크레이지하게 리치하다는 아시안에게.
어쩌면 이 아름다운 진주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가장 큰 권력을 누리는 자가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지닐 자격이 있을지는 몰라도, 안타깝게도 영원하고 절대적인 권력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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