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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너스톤 Mar 01. 2019

칼 라거펠트를 기리며

샤넬과 펜디를 재해석한 천재 디자이너이자 이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전설

칼 라거펠트가 세상을 떠났다.



죽어가는 펜디와 샤넬을 소생시킨 장본인이자,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오뜨꾸뛰르 컬렉션을 탄생시킨 디자이너. 살아 생전 전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당대 그 어느 디자이너보다도 셀럽같은 삶을 살았던 그가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났다. 백발의 포니테일에도 영원히 젊을 것만 같던 그가 말이다. 수많은 추도의 물결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실댔고, 나도 추모의 의미에서 그가 일궈낸 업적을 하나둘씩 살폈다. 정말 엄청난 디자이너이자 엄청난 예술가였다. 퀄팅과 가죽, 까멜리아와 큰 로고로 유명한 라거펠트는 알고보면, 액서사리와 주얼리를 몹시 사랑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가 함께 했던 샤넬 런웨이의 역사를 아래 사진들과 함께 살펴보자.


1990년, 1990년, 1991년
1993년, 1996년, 2005년
2010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6년
2017년, 2018년, 2018년


그는 해체와 재조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치를 패션 속에서 실험했던 사람이었다. 흔히 패션을 단순히 심미적이고 유희적인 것으로만 여기지만, 사실 패션에는 당대의 철학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미래예측이 담겨있다. 감히 어울리지 않을 것들을 함께 조합하고, 일체의 것을 분리해내는 작업 속에서 라거펠트는 하이패션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명품 부티크와 스트리트의 경계를 허물고, 셀럽과 모델의 경계를 허물고, 컬러와 재료의 룰을 깨버리고. 그는 시대를 이끌고 시대를 앞서간 철학자이자, 그 철학을 패션으로 표현한 예술가였다.


칼 라거펠트의 펜디


물론 생로랑과 달리 그는 자신이 만든 브랜드에 금자탑을 쌓기 보다는, 끝없이 다른 브랜드와 협업하면서 패션계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지금 샤넬의 로고도 펜디의 로고도 모두 칼 라거펠트의 머리속에서 새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런웨이를 점령한 PVC도, 정숙한 샤넬수트에 바이커 재킷이 어울린다는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낸 것도, 모피를 걸치지 않고 여기저기 붙이기 시작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평생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끝없는 도전을 통해 패션의 한계를 극복한 그는 뚜렷한 철학만큼이나 남다른 페르소나를 지닌 사람이었다. 백발의 포니테일, 목을 덮는 하이칼라의 흰 셔츠, 블랙 선글라스, 가죽장갑, 그리고 당당한 걸음걸이. 그는 펜디와 샤넬에서 수석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쌓은 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내놓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칼 라거펠트 주얼리 컬렉션도 있었다.


시크하면서도 우아하고, 미니멀하면서도 볼드하고, 세련되면서도 화려하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모순적이지만 수긍이 간다. 그런 그의 스타일은 작은 참 주얼리에서조차 발견할 수 있는데, 자신을 대표하는 아이코닉한 모티브를 주얼리 속에 녹여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고양이, 그의 까만 선글라스, 그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락시크한 이미지와 결합한 와중에, 각종 재료로 블링블링한 주얼리를 선보인 것이었다.


칼 라거펠트 주얼리
칼 라거펠트 주얼리


그에게는 결혼을 하지 않은 그의 곁에는 고양이가 있었으니 왠만한 사람보다 훨씬 더 유명한 고양이 슈페트다. 애인이자 뮤즈였던 밥티스트 지아비코니가 휴가 때문에 고양이를 맡겼는데 그 냥이의 매력에 빠져 결국 자기가 키우게 되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2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을 상속받아 이목을 끌기도 했지만 살아 생전에도 전용 비서와 수의사, 제트기까지 있었던 슈페트는 칼 라거펠트가 누구보다도 아낀 존재였다. 슈페트는 마치 팜므파탈인 진 할로우 같다며 인터뷰를 하고, 또 슈페트를 모티브로 한 가방부터 주얼리까지 만들었으니, 칼 라거펠트도 집사 중의 상집사라 할 수 있을테다. 수많은 랜선 집사를 만들었던 만큼, 슈페트를 모티브로 만든 참과 귀걸이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칼 라거펠트의 고양이 슈페트와 그를 모티브로 만든 귀걸이


그렇게 본다면 칼 라거펠트는 다른 브랜드의 디자이너로 있을 때만큼은 자기의 아이코닉한 페르소나는 지우지만 해체와 재조합이라는 일하는 방식을 통해 그 브랜드의 가치를 고수하면서도 혁신하는 전략을 택했다면, 자신의 이름을 건 칼 라거펠트라는 브랜드에서만큼은 오롯한 자신과 자신을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패션계를 발칵 뒤집어 엎었던 21세기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 워커홀릭이라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는 양손이 모두 필요해서 담배도 술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철저했던 사람. 디자이너로서 역량은 앞에서도 말했고 분명 또 누누히 들어왔을 것이기에 생략하지만, 동시에 활자광이었고 도서 수집가였으며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던 지적인 문화의 아이콘이자, 사진가로서도 감독으로서도 활약했던 팔방미인.


“6살 때였다.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골집 책상에 앉아 이것 저것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 자신에게 말했다. 너는 아주 유명해질 거라고.”


그는 살아 생전 참 많은 명언을 남겼지만, 그보다도 흘려 보냈던 말들 가운데에 괜히 주목하게 된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인터뷰 중에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항상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일국의 대통령보다 더 유명해졌으며 패션업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설이 되었다. 아마 그는 이미 알았을 것이다, 꿈이 재능과 노력을 만나면 현실이 된다는 것을. 타고난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한평생 끝없이 움직이면서도 예측불허의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성공의 이유는 과거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를 기리며 나를 반추하게 된다. RIP.




                                                                www.connersto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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