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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온지 Oct 25. 2020

나는 지금도 광고가 좋다

외국계 광고대행사 기획(AE) 인턴 후기


낙엽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한 작년 가을부터 서서히 벚꽃이 보이기 시작하던 올해 봄까지, 그토록 꿈꾸던 광고기획자를 경험해볼 수 있었던 기회.


그때의 기억을 일 년 만에 꺼내보자니 조심스럽다. 혹여라도 그 기억이 왜곡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몇 번이고 글을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광고인'으로서의 경험은 너무나 소중하다! 좀 더 제대로 짚자면 굉장히 감사한 경험이었달까. 막상 회사를 다니던 중에는 불평도 불만도 많았지만, 그래도 매일 '감사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지난 5~6개월 간 열일했던 내 자리 (평소엔 이것보다 더 지저분함ㅎㅎ)


부끄럽지만 회사를 처음 다니기 시작하면서는 참 자만했던 것 같다. 당시엔 내가 가진 열정과 실력을 맹목적으로 과신한 채 일에 덤볐다. 뭐랄까, 내가 맡은 일들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절대 가만히 있지를 못해, 근처 대형서점에 들려 마케팅 관련 책을 뒤적이고, 어느 광고인의 강연회에 참석해 눈을 반짝이며 노트를 받아적고, 달마다 진행하는 현업인 모임에 기웃거리며 뭐라도 얻어가려고 했다. '회사'라는 울타리 밖에서 더 대단한 것들을 해내고 싶어서.


하지만 그건 정말로 나의 교만이었다. 팀에서 유일하게 타겟층과 근접하다는 이유로 한 광고주의 기획안을 주도했던 적이 있다. 기대와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일주일 간 아이디어를 고민해갔지만, 준비한 기획안을 보여드렸을 때 실망감이 가득 담긴 팀원 분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날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체감했고, 감히 열정만으로 덤벼들기에 광고는 꽤나 단단한 업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는 광고에 비해 내 역량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었다면, 여기저기 부딪히면서는 스스로가 너무 작다고 느꼈달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기도 했다. 매일 아메리카노 세 잔씩은 기본이었다. 하루에 많게는 대여섯 개 광고주 관련 업무를 동시에 띄워두고 알트탭을 남발하며 정신없이 일했다. 좋은 팀을 만난 덕에 거의 매일 정시에 퇴근할 수 있었지만,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퇴근 후 꼭두새벽까지 혼자 기획안을 고민한 게 여러 번이었다. 무엇보다 팀원 분들과 근 한 달 밤을 꼬박 지새우며 준비한 광고주 PT에서 떨어졌을 때의 허탈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함께 고생한, 아니 나보다도 더 많은 고민과 고뇌를 거친 팀원 분들과 서로를 다독이며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지만, 대화 속에 녹아있는 좌절감은 도저히 숨길 수 없다.


인턴 기간 동안 기획안 작성에 사용한 종이뭉치들. 사무실 자리에만 저 정도이고, 집에 가져갔거나 이미 파쇄한 종이들까지 전부 다 합치면 백과사전 두 권 분량은 된다.


일 자체는 정말 즐거웠다!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브랜드와 제품을 누구보다 먼저 접할 수 있다는 건 정말이지 매력적인 일이었다. 특히 내가 기획에 참여한 광고가 공개되어 TV에서, 길거리에서, 또 유튜브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때의 감격과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을 마주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도 참 신기하다. 기획안 아이디어를 위해서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찾아야만 했다. 괜히 내 방을 한 번씩 더 둘러보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무얼 하나 유심히 지켜보고, 식당 옆 테이블 사람들의 대화를 슬쩍 엿듣기도 하고...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오고 가는 버스들에 붙어있는 광고판을 그 자리에서 혼자 역으로 기획하기도 했다. 일상에서 스스로를 자극하고 그 안에서 인사이트를 찾아내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모든 게 새롭고 신기했던 광고 촬영


다만 급격히 바뀌어가는 세상 속 문드러진 스스로가 안타까웠을 뿐이다. 전통 광고업이 죽어가는 요즘,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광고와 나 사이 무언가 '벽'이 생겨버린 듯했다. 지금 이 일에 만족하고 안주해도 되는 걸까?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던 일인 걸까? 인턴 기간 내내 혼자 고뇌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여러 선배 광고인들이 숱하게 얘기해온 것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냐, 그래도 할 수 있어. 나는 그들과 달라.'라고 혼자 되뇌며 흘러들었던 것이고. 뭐든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 깨닫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 광고 기획 인턴 경험은 더더욱 소중하다.


매일 힘들어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광고를 좋아해서였다. 좋아하는 일이었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은 미뤄두고 눈 앞의 일에 충실했달까. 그러는 동안 외적으로는 격변하고 있는 세상, 내적으로는 다 지쳐가는 나 자신을 애써 외면했던 것 같다.


너무 공감하는 한 책 속 어구.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된다. 내 모습이기도 했고.


3월 초, (코로나19 탓에 계획이 틀어지긴 했다만) 복학을 위해 퇴사를 결심하면서 다시금 초조함을 느꼈던 것 같다. 반년을 열심히 달리고 보니 오히려 확신이 사라졌다. 이제 진짜 뭘 해야 하지?


얼마 전, 나보다도 먼저 타 광고대행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인턴직을 거쳐왔고, 어쩌면 나보다도 더 큰 회의감에 갈등했을 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로에 고민이 많던 나에게 그분이 웃으며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광고, 그거- 우리는 후세엔 없을 일을 해본 거잖아!"


광고업이 완전히 죽을 거라는 극단적인 가정 아래 나눈 우스갯소리였긴 하지만, 맞는 말이다. 나에게 있어 광고인으로서의 경험은 어떻게든 너무나도 특별하다. 이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지금 이 글도 없었겠지.


인턴 당시의 모든 '희노애락'의 상황과 기억들은 나에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일이 힘들다고, 업계가 바뀌어간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일을 통해 체득한 것들을, 그때 느낀 즐거움을, 내가 가진 강점을 언제든 어떻게든 활용하면 되는 것이기에.


나는 지금도 광고가 좋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려 팀원 분들께 재차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 팀 막내 인턴을 많이 배려해주시고 존중해주신 덕에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었다. 나를 신뢰하고 믿어주신 국장님, 매일 점심도 같이 먹으며 삶과 일에 있어 아낌없이 조언해주신 차장님, 늘 유쾌하게 나를 격려해주신 옆자리 대리님, 누구보다도 살뜰히 나를 챙겨주신 사수 선배님까지- 너무너무 감사하다! 진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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