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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May 26. 2022

더 멋진 나를 만들어 같은 라운드 테이블에 앉자.

쇠질하는 엄마들의 긍정적 트리거(trigger) J님 인터뷰

저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장애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뭐든 좋으니까 운동을 꾸준히 했으면 좋겠어요. 운동 정말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시간이 없다고 말하죠. 하지만 진짜 시간이 없는 걸까요? 시작이 어려운 거예요. 마음만 있고 쉽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할 때, 뒤에서 '빵!' 하고 때려 주는 트리거(trigger)가 필요해요. 쇠질하는 놀라운 엄마들 텀블러도 그런 의도로 제작했어요. 이런 거 받으면 부담스러워서라도 운동 시작해야 하거든요. 트리거죠, 긍정적 트리거. 제가 긍정적 트리거가 되어 주고 싶었어요.

2022년 5월 어느 늦은 밤, 장애아이 엄마 둘이 줌에서 만났다. 하나는 이 인터뷰집을 기획한 '나'이고, 다른 하나는 나의 첫 번째 인터뷰이가 되어준 갓생러 'J님'이다. 사실 J님을 보며 내가 이 인터뷰 매거진을 기획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장애아이를 키우면서 만난 이 답답한 세상에서, 있는 제도는 최대한 잘 활용하고 없는 건 새롭게 만들어 나가며 매우 현명한 방식으로 세상과 맞짱 뜨는 놀라운 엄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엄마'라는 두 글자에 가두기에 우리(앞으로의 인터뷰이들 포함)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우리 자체가 '장애아이 엄마'라는 정체성이 핵심이 되어 뭉친 사람들이기에 우리를 엄마로 지칭하는 데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아래에서는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1. 장애아이 엄마의 일


나: 자기소개를 좀 해 주세요. 

J: 저는 비장애아(큰애), 장애아(둘째) 형제를 키우고 있는 십수 년차 워킹맘입니다. 원래는 음악 전공자인데 지금은 금융사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나: 와, 아이들 키우며, 특히 장애아이 키우며 직장 일 하시기 쉽지 않으실 텐데 어떻게 병행하고 계세요? 

J: 저는 육아휴직, 출산 휴가 이런 것도 꿋꿋하게 다 썼고, 육아기 단축 근무도 1년을 완료했고,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그 시류를 잘 타서 가족 돌봄으로 또 단축 근무를 계속 연결해서 쓰고 있는 용감한 직장맘입니다. 

나: 그런 제도가 있군요. 사실 제도가 있어도 사용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시면서 일하고 계신 것 같아요. 

J: 런 얘기할 때 사실은 좀 속상한 게, 저는 그나마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제도들을 활용하기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거예요. 대기업이니까 대체 인력도 충분하고 내가 육아휴직하고 출산 휴가 간다고 나한테 눈치 주고 (법 때문에) 나를 자를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근데 현실적으로 작은 회사는 진짜 못 그랬을 것 같아요. 저는 운이 좋았지만, 이런 (국가에서 만들어 준 제도적인) 혜택들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게 참 속상한 포인트죠. 

나: 맞아요. 저만 해도 (대학의 비정규직 강의 노동자니까) 그런 제도를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거든요.

J: 네. 저도 제가 운이 좋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참 씁쓸해요. 못 누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걸 아니까...


나: 직장은 적절히 제도를 활용하여 유지하고 계시고, 그럼 돌봄은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누가 도와주는 분이 계신가요? 

J: 사실 큰애 키울 때부터 남편이랑 둘이서 아침 7시 반에 어린이집에 넣고 저녁 6-7시에 찾아오고 하면서 둘이 스케줄 딱딱 맞춰서 그렇게 애를 키웠거든요. 가족 도움 못 받고 둘이서 손발 맞추는 거에 굉장히 단련된 상태에서 둘째를 만난 거예요. 물론 처음에 아이가 아파서 큰 병원에서 7개 과를 오가고 할 때는 진짜 힘들었어요. 지금은 뭐, 시어머니랑 저랑 남편이랑 셋이 분담해서 하고 있죠. 직장맘이라 재활은 주말 활용하고요. 토요일, 일요일 재활되는 병원 일부러 찾아가지고 주말 재활을 제가 맡아서 하고 있어요. 

나: 그러시군요. 저도 저 일할 땐 엄마가 주로 돌봐 주시고 요즘은 돌봄 소득 제한 없어져서 (자부담금이 있더라도) 그거 이용하니까 좀 나아요. 내년에 장애인 활동 지원 서비스 받으면 좀 더 낫겠죠.  

J: 맞아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비장애아이 키울 때도 시간이 해결해 주는 문제들이 있잖아요. 주변에 봐도 비장애아이만 키우고 있지만 아이 학교 들어가고 그 시기를 못 버티고 일을 그만두는 엄마들이 많아요. 우리는 그 시기가 조금 빠를 뿐이죠. 장애아이 엄마들은 영유아기에 버티기가 힘드니까. 가족의 지원과 인식, 이런 것도 중요하고요. 

나: 맞아요. 어느 정도는 시간이 해결해 주죠.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티느냐가 문제인 것에 공감해요. 

J: 회사에서 출산 휴가 가는 후배들한테도 말해요.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하지 말고 일단 육아휴직하고 버텨 보라고. 제도는 계속해서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 더 좋은 제도가 나올 수 있으니 앞서서 그만둘 생각 하지 말라고요. 

나: 직장에서 그런 말 해주는 선배가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꼭 장애아이 엄마가 아니더라도 결혼과 출산을 계획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잘 버틴' 선배로서 굳건히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것 같네요.


#2. 장애아이 엄마의 공부


나: 이 와중에 지금 박사과정 공부도 하고 계신 걸로 알아요.  

J:  네. 보건학 석박사 과정에 들어갔어요. 원래 음대 나와서 교육학 석사를 했고, 또 사이버대에서 부동산학과를 다니다가 아이 의무기록 같은 걸 제대로 읽고 싶어서 보건행정을 복수전공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공부할 거면 마흔 되기 전에 체력 있을 때 얼른 하자 싶어서 보건학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가게 됐어요. 

나: 진짜 그 에너지가 대단하세요. 

J: 근데 저는 학위가 진짜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는 게, 제가 처음 민원을 걸었던 게 교육청 민원이거든요. 특수교육지원청에 피더시트(장애영유아를 위한 자세유지 의자)를 요청한 건인데, 아이가 (특수교육지원청에서 운영하는) 영아 교실 다닐 때 반에 못 앉는 아이가 두 명 있었어요. 근데 피더시트는 하나밖에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간을 반 반 나눠서 앉으라는 건가요? 그래서 제가 국민신문고에 썼죠. 제가 교육학 석사고 교육 전문가다, 실제 필드에서 몇 년 동안 무슨 일을 했다 이야기하고, 교육 현장에서 의자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학생을 부르는 케이스는 없다고 남겼죠. 그랬더니 이제 장학사가 며칠 후에 전화를 해서 미리 챙기지 못함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고, 다른 지역에서 안 쓰는 것을 빌려다 놓겠다고 하고 잘 마무리됐어요. 그때 제가 느낀 게, 제가 교육 전문가고 교사 경력도 있고 필드에서 일해 본 사람으로서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의견을 내니까 좀 더 잘 들어준 것 같아요. 

나: 아무래도 그냥 엄마로서만 이야기하는 것보다 전문가로서 접근하면 더 귀 기울여 주는 거 같아요.

J: 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부당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겪을 거예요. 그때 학위든 자격증이든 내가 뭐든 더 잘 알면 저 사람들이 나의 말을 무시하지 않을 거거든요. 우리는 동일한 라운드 테이블에 앉아야 해요. 근데 준비가 안 된 사람한테는 그 라운드 테이블 자리 안 줄 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장애 부모라는 자체만으로는 같은 라운드 테이블에 앉기 힘들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랑 마주 앉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려면 나도 준비된 사람이 되어 있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계속 공부를 했어요. 

나: 와, 명언이 막 쏟아져 나옵니다. 동일한 라운드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준비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멋집니다. 


#3. 장애아이 엄마의 민원


나: 민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부당한 일에 민원을 잘 쓰시는 걸로 알아요. 실제로 얻어내신 것도 많고요. 

J: 네. 이 얘기는 꼭 써 주셨으면 좋겠는데, 민원을 쓸 때 이렇게 쓰면 좀 더 피드백이 잘 오는 것 같아요. 먼저 처음에는 팩트를 말해요. 그다음에 이게 왜 내 감정을 상하게 했는지를 쓰죠. 장애 영아 교실에 못 앉는 아이가 둘인데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왜 내 아이가 앉지 못하는지 저는 불만이에요. 그리고 마지막은 약간 전문적인 지식을 깔아줘요. 제가 교육학 석사고 필드에서 일했던 사람으로서 의자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학생을 부르는 경우는 없어요. 그리고 대안을 제시해 주죠. 그래서 당신이 어떤 피드백을 줬으면 좋겠어. 라고요. 

나: 오. 효과적인 민원 작성법!!

J: 네. 그냥 막무가내로 나 기분 나빠. 하는 것보다 차근차근 이런 면에서 저는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잘 처리해 주세요. 라는 흐름이 있어야 해요. 이번에 교통사고(휠체어 개조 차량이 뒤에서 받히는 바람에 특수차량을 고칠 수 있는 곳에 수리를 보냈고, 보험사에선 같은 급의 특수차량을 렌트해 줄 수 없어서 일 교통비 2만 원만 주겠다고 했으며, 결국 아이는 차가 없어 2주를 학교를 못 간 일이 있었다.) 민원도 그런 식으로 풀었어요. 내가 후미 추돌로 사고를 당했어요. 100% 피해고, 근데 내가 억울한 거는 내 이동권과 내 자녀의 이동권, 교육권이 침해당했다는 거예요. 이게 이런이런 부분에서(전문 지식 까는 중)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현실적인 보상안을 마련해 주세요. 그리고 그 처리 결과를 나한테 공문 형태로 공유해 달라고 하는 것도 필요해요. 그래야 공문이 안 되면 다른 방식의 피드백이라도 그쪽에서 제안할 거거든요.


#4. 장애아이 엄마의 운동


나: 이제 운동 이야기를 해 보죠. 요즘 진짜 운동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J: 네, 제가 왜 운동을 하게 됐냐면, 제가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말은 멀쩡하게 했지만 사실, 둘째 장애아이를 낳고 회사 복직 전까지는 그냥 슬펐지 막 우울증 걸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회사 복직하고 초반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회사는 가야 되는데 애가 경기하고 응급실 가고 막 그러니까 이런 게 다 모여 가지고 진짜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우울증이 와 버렸는데, 정신과 상담을 받고 우울증 약도 먹었거든요. 약 먹으니까 좋아지긴 하는데 이게 살이 너무 많이 찌는 거예요. 살이 막 80kg까지 찌니까 거기에 당뇨, 고혈압이 따라왔어요. 35살 때 건강검진을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지금부터 고혈압 약 먹으면 죽을 때까지 먹어야 된다, 아직 젊으니까 운동을 한번 해 봐라, 해서 그때는 그냥 웃으면서 그런가요? 하고 넘겼죠. 근데 그 후에 남편 쪽 친척 결혼식을 가는데 10년 만에 본 친척분이 "00 엄마니? 너 못 알아보겠다" 그러는 거예요. 

나: 어머나, 오랜만에 만나서요?

J: 네. 이게 되게 실례되는 말이잖아요. 암튼 그날 결혼식 내내 기분이 엄청 더러웠어요. 그래서 그날로 집 근처에 헬스장에 등록을 해 버렸죠. 그게 딱 2년 전 오늘입니다. 

나: 와, 그렇군요. 근데 저는 J님을 2년 전 그 이전에 만났었잖아요. 진짜 지금 건강해 보이고 활력 넘쳐 보여서 좋아요. 

J: 체지방을 처음 1년 동안 거의 17kg을 뺐어요. 그리고 지금 유지를 1년 하고 있는데, 내가 노력해서 건강해졌다는 성취감도 크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더 가뿐해요. 그리고 둘째 아이가 옛날에는 걷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걸을 거란 희망이 없어지면서 아, 더 크면 내가 들어야 하는데, 제가 원래도 허리가 안 좋아서 아이 클 때까지 허리를 잘 보존하려면 운동을 해야 되는 게 맞더라고요. 헬스로 시작해서 요즘은 관절 무리 안 가게 하려고 수영도 시작했는데 수영 선생님이 잘한다고 칭찬해 줘서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나: 진짜 멋있어요. 저도 J님이 운동하시는 모습 보며 자극받아서 요즘 홈트로 요가 시작했어요. 

J: 제가 운동을 해 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너무 좋으니까 다른 엄마들도 했으면 좋겠는 거죠. 장애아이 엄마들 솔직히 힘드니까 우울해 있고 그런 거, 저도 그랬지만 진짜 별로거든요. 남들도 쟤 장애인 엄마야, 하면서 안타깝게 보는 거 너무 싫어요. 내가 왜 불쌍해요? 나는 내 자식 부양할 능력 되는 사람이고 건강하고, 나 이렇게 의지 많아서 이렇게 다 하고 사는데 뭐가 불쌍해?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그리고 다른 엄마들도 그런 눈빛 안 받았으면 좋겠는 거예요. 

나: 아, 그래서 그 '쇠질하는 놀라운 엄마들' 텀블러도 사비로 막 제작하시고 나눠 주시고. 저도 감사히 받았습니다. 

J: 제가 남들을 돕는 방식이 되게 웃긴 게, 부담을 줘요. 전에 다른 분이 저한테 운동 관련해서 상담을 요청해 오셔서 단백질 파우더 뭐 먹냐 이런 얘기를 하다가 제가 먹는 거 하나를 선물로 보내 드렸어요. 얼마 안 하거든요. 

나: 하하하. 근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운동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그쵸? 부담!!!

J: 네. 맞아요. 텀블러도 사실 제가 쓰고 싶어서 만든 건데, 인스타로 몇 분께만 드린다고 올리고 실제로 보내 드렸어요. 어머님들한테 부담을 주는 거죠. 이거 받았으면 운동해야 해!! 이렇게. 사실 이게 엄청난 돈은 아니잖아요. 내가 이거 없다고 굶어 죽는 거 아니니까. 

나: 맞아요. 주변 사람들을 돕는 아주 좋은 부담이죠. 저도 이거 텀블러 보면 피곤해서 그냥 자려다가도 요가 영상 틀어놓고 어느새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해요. 사실, 저는 운동이고 공부고 다 관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일단 시작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멈춰 있으려는 관성 때문에. 근데 일단 시작을 해 놓으면 또 그대로 쭉 가는 그런 힘이 있잖아요. 그 시작을, 그 관성을 깨 주시는 게 바로 J님의 선물이네요.   

J: 그거예요. 저는 그냥 제가 좋은 트리거(trigger)가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 2-3만 원 써서 주변 사람들 좋게, 기분 좋게 성공시켜 줄 수 있다면 너무 좋잖아요. 결정적인 한 방을 빵 때려 주는 거죠. 우리 인생에서 결정적인 한 방이 늘 있잖아요. 그 사람의 인생을 더 낫게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트리거가 되면 좋지 않을까요?

나: 관성을 깨 주는 긍정적인 트리거!! 제목 뽑았네요, 저. 하하하


#5. 장애아이 엄마의 전생과 갓생


나: 마지막으로 질문드릴게요. '전생'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닌, ㅎㅎㅎ 장애아이를 낳기 전의 삶과 지금의 삶, 저는 세상이 완전 뒤집혀 버린 기분이었는데, J님은 어떠세요? 

J: 저도 너무 새로운 사람이 되어 버렸죠. 제가 음악 전공자라고 했잖아요. 전생은 그냥 건강하고, 어떻게 보면 예중 예고에 또 잘 나가는 음대 졸업했으니까 음악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건데, 굉장히 경쟁이 심한 속에서 살아왔거든요. 엘리트 코스에 또, 대기업으로 취업도 잘했고 했지만 회사에서는 나름대로 엄청 스트레스가 있었어요. 근데 이게 둘째를 낳고 나니 업무적 성취 같은 건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내가 승진한다고 우리 애가 걸어? 아니잖아요.  

나: 그러셨군요. 저도 학교에 있다 보니 비정규직 교수로서 정규직이 아닌 게 계속 콤플렉스였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저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J: 맞아요. 제가 욕심이 진짜 많았는데 둘째 낳고 그게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리고 제가 우울에 빠져 있을 때 어느 순간 주변을 둘러봤는데,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회사 사람들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나를 그 우울에서 끌어내 주려고 너무 노력을 하고 있는 게 보였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내가 저 사람들한테 잘했나? 아뇨. 저 사실 주변 사람들 그렇게 못 챙기고 엄청 바쁘게 살았는데, 저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고 내가 어려움이 있을 때 나를 끌어올려 주려고 노력을 하다니, 너무너무 고마운 사람들이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끌어내 주지 않았다면 저는 절대 지금처럼 못 살았을 거예요. 그런 생각하면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이제 주변 사람들을 챙기게 됐어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운동한다고 그러면 막 도와주고 조언해 주고 선물 주고, 이런 사람이 된 거예요. 

나: 좋은 사람들 속에 있는 것도 되게 운인 것 같아요. 저는 제 성격이 그래서도 그렇지만 저 혼자 기어 나왔거든요. ㅎㅎㅎ 혼자 이미 나온 후에 주변에다가 '나 살아있다' 한 케이스라, 근데 저도 기어 나온 후에는 많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습니다. 


나: 그럼, 진짜 마지막 질문. 지금 갓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J: 네, 저 지금 너무 갓생이에요. 왜냐면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잖아요.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돈은 돈대로 많진 않지만 벌고 있고. 사실 이렇게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근데 제가 둘째를 낳고 가장 크게 느낀 거는 내가 가지지 못한 거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게 뭔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내가 애를 둘 낳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되게 대단한 일이고, 서울 한복판의 좋은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일이고, 내가 박사를 입학할 수 있는 능력도 되게 좋은 거고. 등록금도 제가 내거든요. 뭐, 아이 둘 다 자기의 속도대로 앞으로 나가고 있고. 또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같이 으쌰 으쌰 해주고, 인스타에서도 얼굴도 모르는 엄마들이 저한테 공감해 주고 너 잘하고 있다고 해 주고, 너 운동하는 거 너무 보기 좋다 이런 얘기해 주는 것도 되게 기분 좋아요. 그런 게 사회적 자원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나한테 공감과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 그러고 보면 나는 참 사회적 자원이 잘 갖춰진 사람이다, 이런 자원을 활용을 해서 제 최종 목표는 투쟁이니까, 필요한 곳에 민원도 넣고요. 세상이 절대로 그냥 좋아지진 않잖아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제도도 다 선배 장애 부모들이 싸워서 얻어내신 거니까요. 각자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로 투쟁하면서 조금씩 더 나아지게 만들면 그게 갓생 아닌가요? 


장애아이를 낳고 분명히 세상은 뒤집어졌지만 그는 다른 것을 얻었다. 
경쟁을 내려놓고 주변 사람을 돕는 마음, 사회적 자원을 만들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약자를 돌아보고 연대하는 마음, 장애아이도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지적, 체력적, 그리고 금전적 자원 비축까지!! 그의 선물이 트리거가 되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준비된 갓생러 J님의 다가올 40대, 50대, 60대가 기대된다. 

어떤 장애아이 엄마들에겐 일상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투쟁이고 운동이다.
요즘 끊이지 않는 발달장애 부모의 안타까운 비보를 들으며, 지금 그곳에서 숨쉬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잘하고 계신 것이니 제발 삶을 놓지 마시라고 말하고 싶다. 아직, 우리는 이룰 것이 많다고, 한 명이라도 더 연대해야 힘이 커지지 않겠냐고, 지지 말고 숨 쉬시라고 마음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남았기에, 기깔나게 멋지지 않은가. 

*육아기 단축근무, 가족돌봄 단축근무, 장애아이돌봄 제도 관련해서는 밑줄친 부분 누르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페이지로 링크 걸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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