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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uly Nov 08. 2023

빈곤 과정 by 조문영

(논문 쓰기 일지 - 3일째)



조문영 선생님의 책인 <빈곤 과정>을 읽고 있다.           


인류학자이셔서 그런지 아니면 조문영 선생님의 글 스타일이 내게 맞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글이 재밌고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어딘가 비슷한듯 하고. 그래서 조문영 선생님의 글 스타일도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인상 깊었던 곳들 몇 군데 적어보자면


p.4 빈곤은 어디에나 있다.


            p.5 이런 세계에선 누구도 빈곤의 천태만상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는 위치에 있을 수 없다. 봉사자, 활동가, 정책 실무자, 연구자, 예술가, 기자 등 빈곤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하고 쟁점화하는 매개자mediator, 대화자interlocutor 집단은 빈곤 문제의 해결이 요원해 보일수록 역설적으로 증가했다. 정부는 선별적 포섭, 보호, 배제를 제도화하면서 공공부조 수급자에서 난민, 이주자에 이르기까지 빈자를 식별하고 등급화한다. 지구상의 공유부commons를 상품화하고, 인간 생명을 인적 자본으로 취급하며 경쟁을 독려해온 기업은 고도로 산업화, 전문화된 반빈곤 네트워크의 젖줄이 됐다. 이들은 사회공헌, 윤리적 자본주의, 임팩트 투자, 환경-사회-거버넌스ESG등 시기별로 다양한 구호를 변주해가면서 빈곤산업의 언어와 문법을 '혁신'하고, 다수의 빈곤을 초래한 대가로 축적한 자본의 극히 일부를 정부, 대학, 비영리재단, 시민단체에 - 세려된 퍼포먼스와 함께 - 재분배한다.           


            p.5 나를 포함한 시민 대중도 빈곤의 연결망에 깊숙히 연루되어 있다. 알아서 살아남기를 강요하던 국가 통치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족 바깥의 삶에 대한 무심함을 내면화한 채 '쓸모없는' 생명의 축출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공조자다. 주가와 부동산이 오를수만 있다면 해고, 철거, 산업재해, 환경 파괴를 적당히 눈감고, 쓰레기 소각장, 축사, 심지어 복지 기관까지 '혐오 시설'이라 부르며 빈곤과의 물리적 거리 두기에 안간힘을 쓴다. 아프리카 아동이 후원의 보답으로 보낸 손편지에 감동하면서도, 자녀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친구와 어울리는 것엔 신경이 쓰인다.           


            p.8 제도, 법규, 지식, 기술 등 일련의 장치들이 행위자와 관계를 맺는 가운데 특정한 주체(성)가 형성되는 장을 레짐regime으로 본다면, 빈곤에 대한 인식과 감각의 형성도, 빈곤 경험의 재현과 빈곤 문제의 공론화도 모두 한 시대의 빈곤 레짐과 관계하면서 이루어진다. 빈민이 선험적으로 정의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 구분된 다음에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라면, "빈민의 특징, 능력, 욕망을 규정함으로써 그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하는 활동" 역시 빈곤 레짐이 작동한 결과다.           


            p.10 빈곤-복지 연합이 노동, 발전, 자립-자활, 의존(성)등에 관한 지배적 규범을 재생산하면서 빈자에 대한 낙인과 폭력을 강화하는 과정을 담았다.           


            p.28 가난은 동서고금의 현상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를 '빈곤'이란 개념으로 문제화하고, 이에 개입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빈민the poor'을 구성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다.           


            p.28 유럽에서는 중세 말엽부터 화폐 경제가 발달하고 인클로저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남루한 사람들의 무리와 그 집합적 삶의 양태를 '사회'라는,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영역으로 새롭게 포착하고, 빈곤과 빈민을(종교적, 개인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풍경을 뒤바꾼 빈곤과 실업에서 규칙성, 법칙성을 규명하려는 욕구가 증가했다. 이때 사회는 선험적 출발점이라기보다는 이 대상을 관찰, 측정, 관리, 교정하기 위해 새로운 지식, 제도, 기관, 직업이 출현하면서 "사후적으로 구성된 상호작용적 현실"에 더 가깝다. 사회의 발명 또는 발견은 통치에 관한 사유의 출현을 수반했다. 가난한 아이에게 교육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아이에게 동정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 교육이 사회에 좋기 때문이다".          


            p.29 유럽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이러한 사회문제들을 시장이나 개인의 도덕성에 맡기지 않고 사회적 연대를 통해 관리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탄생했다.           


            p.30 유럽의 특수한 복지국가 체제는 한국 복지가 따라가야 할 선진으로 일찌감치 추대되었지만, 이 체제의 발전 과정에서 제기된 비판과 드러난 모순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게 문제다. 적어도 두 가지 쟁점이 떠오른다. 첫째, 사회보장이 계급 착취의 근본 문제를 건드리지 않은 채 (사회주의 같은) 급진적 혁명의 가능성을 통제 가능한 변화의 수준으로 고착시켰다는 비판이다.          


            p.30 둘째, 사회보장 시스템은 빈곤을 실업, 질병, 노령화 등 노동능력 상실에 따른 문제로 파악하면서 '노동'을 가치판단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다.          


            p.31  그러나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만 사회부조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보편적인 복지 모델을 유지해온 스웨덴에서조차 그대로 유지되었고, 사회복지의 급여 수준이 노동시장의 최저임금 수준보다 더 낮아야 한다는 열등 처우의 원칙은 영국의 19세기 신구빈법 이래 사회복지의 상식으로 정착했다.           


            p.31 노동능력의 결여를 수급의 조건으로 삼는 공공부조는 결과적으로 (2장에서 논할) 노동 대 빈곤, 노동자 대 빈자라는 이분법을 고착시키면서 후자의 열위를 정당화했다.           


            p.31 노동의 강제적 필연성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은 차치하고라도, 사회보장 시스템의 노동중심성은 노동의 범위를 임금노동으로 축소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한 가정에서 건강한 성인 남성이 임금노동을 수행하는 '부양자' 모델로 가정되고, 여성은 온종일 수행하는 비임금 돌봄노등을 인정받지 못한 채 '피부양자'로 남았다. 제임스 퍼거슨이 유럽의 사회보장을 정규직 남성 임금노동자와 그 가족만을 대상으로 사회적 돌봄을 제도화했던 불완전하고 가부장적인 구성물이라고 비판한 이유다.           

            p.32 나는 보편의 지위를 점한 유럽 사회보장 역사에서 노동중심성이 단단히 똬리를 틀고 정치적 열망의 급진성이 무뎌지는 측면에 주목했지만, 한국 복지, 행정학계에서 이런 비판을 제기하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유럽에서 사회적 연대가 계급 대립의 타협안으로 등장했다면, 한국에서는 이 과정에 개입할 만한 좌파 세력이 일찌감치 몰락했다는 게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p.33 시장경제의 파괴적 효과로부터 삶의 지속과 안정을 어느 정도 보장받기 위해 발명된 담론적, 물질적, 제도적 구성물을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라 할 때, 한국의 사회적인 것은 집합적 연대를 토대로 한 사회보장이 아닌 개별 가족의 생존 전략을 핵심으로 했다. 일부 중산층은 기업 복지에 기댈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노동시장에 고용되어 임금을 받거나, '비공식' 경제에 참여해 부족한 소득을 벌충해야 했다.           

            p.34 이러한 국가 주도하의 사회 통치는 복지를 통합과 연대가 아닌 선별적 포섭과 배제, 사회적 버림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p.39 애초부터 공공복지 수준이 낮은 발전국가 체제에서 가족중심의 생존을 위해 분투해온 일반 시민들 역시 자신들과 무관해 보이는 빈곤층 대상 정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개별 가족으로 흩어진 채 한국 복지의 지배적 규범으로 정착한 '자산 기반 복지'을 확보하는 데 매진했다. 한 세기 전 유럽에서 탈정치적 해법이라는 혐의를 받았던 '사회적 연대'는 한국에서 이제 불가능한 꿈의 언어로 등장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를 앞두고(...) '국가의 실패' 혹은 '정치의 실패'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문제, 즉 '연대의 실패' 혹은 '사회의 실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첫째는 NEET의 문제도 사회보장 시스템의 노동중심성에서 노동의 범위가 임금노동으로 축소되었다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즉 NEET 라는 용어 자체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인구를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임금 노동을 위한 준비가 되지 않은 인구들을 임금 노동으로 끌어오기 위한 하나의 준비단계라는 것이고.           


레짐에 대한 조문영 선생님의 설명처럼 결국 NEET 청년이 선험적으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집단으로 구분된 다음에야 드러나는 존재라면, NEET의 특성, 능력, 욕망을 규정함으로써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하는 활동 역시 NEET 레짐이 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렇다면 왜 NEET를 구성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할 때 결국 이들을 다시 임금 노동으로 끌어오기 위한 것이고, 이는 기존에 구직을 하던 실업자들에다가 예전에는 구직단념자라고 불렸던 비경제활동인구까지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NEET라는 집단으로 구성되는 것이 문제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잘 모르겠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삶의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를 앞두고(...) '국가의 실패' 혹은 '정치의 실패'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문제, 즉 '연대의 실패' 혹은 '사회의 실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는걸까? 그럼에도 어느에 포커스를 두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 더 책을 읽다보면 보이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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