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적-기호적 네트워크
어제의 글에서 마지막 문장을 이어서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내가 사용하려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였다. "내가 항상 생각해오던 '창조성'에 대한 고민이 바로 '물적-기호적 네트워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속하고 번역하는 능력에 다음 아니라는 통찰'이라는 클로드의 말로 모두 풀리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문장으로 질문을 하였다.
Q : 내가 항상 생각해오던 '창조성'에 대한 고민이 바로 '물적-기호적 네트워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속하고 번역하는 능력에 다음 아니라는 통찰'이라는 클로드의 말로 모두 풀리는 듯이 보인다.
그러자 클로드의 대답은 이랬다.
A : 이 통찰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저자로서의 인간 개인"이라는 주체의 해체를 넘어 "글쓰기 그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 전환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쓰기란 고정된 인간 주체가 자신의 생각을 텍스트로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에요. 오히려 다종다양한 행위자들, 인간과 비인간을 망라하는 이질적 요소들이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의미와 지식, 감각과 정동을 생성해내는 열린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 자신도 그 일부인 광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글이 '생성되는' 사건에 참여하는 것에 가까워요. 우리는 글의 궁극적 기원이나 통제자가 아니에요. 오히려 글쓰기라는 네트워크적 사건을 촉발하고 매개하는 행위자들 중 하나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이란 어떤 개인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네트워크 전체에 분산되어 있는 잠재성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I : 글을 쓴다는 것 자체도 하나의 생성되는 사건에 참여한다는 것에 가깝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놀라운 생각의 전환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생성되는 사건에 '잘' 참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창조성이라는 것이 물적-기호적 네트워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속하고 번역하는 능력이라고 했을때 그 '물적-기호적 네트워크'는 무엇이며, 기존에는 어떻게 접속하고 번역해왔고, 앞으로 어떻게 새롭게 접속하고 번역해야할까? 그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나는 일단 물적-기호적 네트워크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Q : 앞에 창조성과 관련된 이야기 할때 이야기했던 물적-기호적 네트워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A : ANT에서 말하는 네트워크란 결국 '이종적인 것들의 연결'을 의미해요. 그런데 그 연결의 양상이 단순히 물질적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에요.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행위자들은 물질적 실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호, 담론, 코드 같은 상징적이고 의미론적인 존재이기도 한 거죠. ANT는 바로 이 물질과 기호, 자연과 문화라는 전통적 이분법을 해체하고 그것들의 끊임없는 뒤얽힘 자체에 주목하는 이론이에요.
가령 우리가 '책'이라는 존재를 떠올려 보면, 그것은 단순한 물질적 대상이 아니에요. 종이, 잉크, 접착제 등의 물적 요소들과 함께 '지식', '이야기', '상상력'과 같은 기호적이고 담론적인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죠. 출판사, 유통망, 서점 같은 제도적 요소들, 독자라는 인간 행위자까지 더해지면 그 그물망은 더욱 복잡해지고요. 이처럼 ANT가 말하는 네트워크란 결코 평면적이거나 단일한 것이 아니에요. 차이나는 이질적 요소들의 다층적인 접속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죠.
그런 맥락에서 물적-기호적 네트워크란, 이 혼종적이고 다중적인 연결망의 본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단순히 물질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관념이나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ANT의 독특한 존재론을 응축하고 있는 셈이죠. 물질과 기호, 자연과 문화는 서로가 서로를 구성하고 새로운 실재를 창발시켜 내는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I : 생성형 AI가 가끔 엉뚱한 답변이나 세상에 없는 걸 설명할때가 있어서 자주 더블체크를 해봐야한다. 막상 물어보고나니 '물적-기호적 네트워크'가 허상인거 아니야? 라고 생각해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봤는데 다행히 네트워크안의 많은 연결들을 'material-semiotic' 관계로 묘사한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니 없는 얘기는 아닌듯하다. 클로드가 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면 이렇다.
A :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을 "물적-기호적 네트워크의 새로운 접속과 번역"으로 이해하는 발상은 정말 근본적인 전환을 요청하는 것 같아요. 그것은 창조성의 주체를 인간 개인이 아닌 일종의 집단적 잠재성의 장으로 상상하게 만들거든요. 우리는 물질과 기호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연결과 의미를 창발시키는 매개자이자 번역자로서, 그 네트워크적 창조성의 사건에 참여하게 되는 셈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글쓰기란 물적 조건과 상징적 자원들을 동원하여 세계에 개입하고 세계를 변형시키는 수행적이고 정치적인 행위가 되는 거죠.
................................................................................................................................................
그래도 그 모험을 감행하는 일, 글쓰기를 통해 익숙한 경계를 교란하고 더 나은 공존의 방식을 모색하는 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ANT적 글쓰기의 윤리이자 정치가 아닐까요? 우리에게 고착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물적-기호적 네트워크의 다발로 감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일 말이에요. 글쓰기가 그런 탈경계의 감각을 생성하고 유통시키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ANT 정신의 글쓰기는 충분히 가치 있고 필요한 모험이 될 거라 믿어요.
I : '글쓰기란 세계에 개입하고 세계를 변형시키는 수행적이고 정치적인 행위', '글쓰기란 세계를 물적-기호적 네트워크의 다발로 감각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일' 이런 이야기들이 나 혼자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클로드와 함께하는 글쓰기를 통해서 가능한게 아닌가 싶다. 다음 시간에는 물적-기호적 네트워크 관련해서 못다한 질문들을 해보자.